지금으로부터 20년 전, 기자는 볼보가 론칭한 S70, V70 시승회 참석을 위해 제주도로 날아갔다. 볼보는 전통적으로 왜건을 잘 만들기로 소문난 브랜드. V70은 왜건이지만 고성능 모델인 V70R도 나올 만큼 개성 넘치는 콘셉트가 자랑거리였다. 과속 단속 카메라가 많은 제주에서 S70R과 V70R을 시승하는 건 차라리 고문에 가까웠다. 두 차는 피 끓는 심장을 주체하지 못하고 수시로 으르렁댔다.
볼보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같은 해에 V70 XC(크로스 컨트리)를 내놨다. 험로주행에 대비해 V70의 지상고를 50㎜ 높이고 루프 캐리어를 댄 크로스오버 개념의 차였다.
20년이 흐른 지금, 이번엔 가평 아난티클럽에서 V70 XC의 증손자쯤 되는 크로스 컨트리를 만났다. 2세대 V70 XC(2000~2007)와 3세대 XC70(2007~2016)을 거치며 쌓은 노하우는 이제 완숙의 경지에 이른 느낌이다.
볼보에서 투박한 느낌이 사라진 건 몇 년 됐지만 크로스 컨트리의 세련미는 기대 이상이다. ‘토르의 망치’ 헤드램프는 볼보임을 다시 한 번 일깨우고, 부드러우면서도 강인한 곡선이 차체를 감싼다.
차체 높이는 V90에 비해 65㎜ 높다. 세단처럼 푹 꺼지는 느낌도 없고, SUV처럼 껑충하지도 않다. 특히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성이라면 승하차하기에 적당한 높이다.
S90, XC90의 것과 같은 대시보드는 단정하고 세련된 느낌이다. 어떻게 이렇게 과거의 볼보와 다를 수 있을까. 이제는 익숙해질 때도 됐는데, 아직도 감탄사가 나온다.
직렬 4기통 2.0 디젤 터보 엔진은 8단 자동변속기와 짝을 이뤘다. 2.0 디젤이지만 최고출력이 235마력, 최대토크가 49.0㎏‧m에 이르는 강력한 파워를 지녔다.
볼보자동차코리아가 시승코스를 중미산 일대로 고른 이유도 이런 강력한 파워에 대한 자신감이 아니었을까. 8단 자동변속기의 민첩한 반응은 일품이었지만, 중미산의 와인딩 로드는 패들 시프트를 머릿속에 맴돌게 했다. R-디자인 모델에는 패들 시프트가 있지만 국내에는 아쉽게도 수입되지 않는다.
사실 파워보다 놀라운 건 정숙성이었다. 기존 볼보 디젤 모델의 경우 가속 때 ‘우웅’하는 흡기음이 경쟁차보다 크게 들렸었다. 그러나 크로스 컨트리는 가속 페달을 깊게 밟아도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다. 귀를 쫑긋 세우고 주의를 기울이면 살짝 들릴 정도로 고요하기만 하다.
볼보자동차 이현기 매니저는 흡기 대책에 비결이 있다고 했다. 엔진룸을 덮는 보닛에 실링처리를 꼼꼼히 했고, 펜더에서 도어 쪽으로 들어오는 틈새에도 방음재를 더했다. 그 결과 가솔린 차 못지않은 정숙성이 완성됐다.
강력한 엔진에 비해 서스펜션은 살짝 아쉬웠다. 고속 와인딩을 즐기기에는 다소 소프트한 느낌인데, 스포츠 모드에서도 많이 단단해지지는 않는다. 주행모드는 에코, 다이내믹, 컴포트, 오프로드, 인디비주얼 등 총 다섯 가지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볼보는 극단적인 스포티함을 추구하는 모델을 제외하면 부드럽고 안락한 차를 주로 만들던 브랜드다. 게다가 크로스 컨트리의 콘셉트는 또 어떤가. 혼자 타기보다는 가족과 함께 레저를 즐기기 위한 차다. 그렇다면 현재의 서스펜션 세팅은 차의 콘셉트에 잘 맞는다고 할 수 있다.
볼보는 이보다 더 스포티하고 민첩한 차를 원하는 이를 위해 V40 크로스 컨트리도 갖추고 있다. 싱글족이나 젊은 부부들에게는 V40 크로스 컨트리가 더 어울릴 수도 있다.
와일드한 운전을 즐기지 않는다면 크로스 컨트리의 넓은 공간활용성에 크게 만족할 것이다. 기본 트렁크 용량은 560리터이고 뒤 시트를 접으면 최대 1526리터까지 늘어난다. 뒤 시트를 접을 경우 키 198㎝의 성인도 누울 수 있을 만큼 광활한 공간을 만들 수도 있다.
틈새 모델이라 해도 어차피 많은 사람들은 이 차를 왜건으로 볼 것이다. 왜건에 대한 선호도가 떨어지는 국내 시장에서 이 점은 볼보자동차가 넘어야 할 장애물이다.
반면에 이런 점만 극복한다면 볼보의 독무대가 될 가능성도 있다. 해외에서 경쟁하는 메르세데스-벤츠 E클래스 왜건이나 BMW 5시리즈 투어링, 아우디 A6 왜건 등이 국내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BMW는 구형 5시리즈 투어링을 들여온 적이 있으나 반응이 신통치 않아 신형 5시리즈 투어링 도입을 주저하는 상황이다.
가격은 6990만~7690만원으로 여타 수입 SUV보다 다소 저렴한 편이다. 세단보다 넓은 공간활용성과 SUV의 기능성을 원한다면 현재로서는 볼보 크로스 컨트리가 정답이다.
평점(별 다섯 개 만점. ☆는 1/2)
익스테리어 ★★★★☆
인테리어 ★★★★★
파워트레인 ★★★★☆
서스펜션 ★★★★
정숙성 ★★★★★
운전재미 ★★★★
연비 ★★★★☆
값 대비 가치 ★★★★
임의택 기자 (ferrari5@rpm9.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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