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승용차시장에서 현대·기아차의 점유율은 80%에 육박한다. 독과점이라는 얘기가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 한데 이보다 더한 게 소형 상용차시장이다. 한국GM의 다마스, 라보 그리고 일부 수입차를 제외하고는 모두 현대차와 기아차가 휩쓸고 있다.
물론 그동안 경쟁차가 없었던 건 아니다. 오래전 얘기지만 대우자동차가 1톤 ‘바네트’를 내놓은 적이 있고, 르노삼성의 전신인 삼성자동차도 1톤 ‘야무진’을 시판한 적이 있다. 두 회사가 1톤 트럭에 집중했던 건 이 시장이 의외로 크기 때문이다. 지금도 현대 포터는 매달 8000대 가깝게 팔려 나간다. 기아 봉고까지 합치면 월 평균 1만2000~1만3000대 규모다.
이 알짜배기 시장에 르노삼성이 ‘마스터’라는 밴으로 도전장을 내밀었다. 세미 보닛 타입에 지붕이 높게 설계된 게 현대차의 쏠라티와 비슷하다.
마스터의 실물은 이미 발표회에서 봤지만 시승을 하려고 보니 거대한 덩치가 부담스럽다. 게다가 시승차는 스탠더드 버전(S)보다 차체가 높고 긴 라지 버전(L)이다. 차체 높이가 무려 2485㎜(스탠더드는 2305㎜)에 이른다. 근래 들어 이 정도 높이의 차를 탄 건 메르세데스-벤츠 스프린터 이후 처음이다.
실내는 단출하고 검소하게 꾸몄다. 재밌는 건 수납공간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 조수석 쪽 대시보드에는 글로브 박스 외에도 맨 위, 중간 두 곳에 수납공간이 있고, 센터페시아 가운데에도 2단 수납공간이 마련된다. 좌우 코너에는 작은 전화기 같은 소품을 담을 수 있는 공간이 있는데, 크기를 키우면 스마트 폰 수납도 가능하겠다. 머리 쪽에 마련된 것까지 합치면 수납공간이 15개에 이른다.
마스터는 2.3ℓ 디젤 트윈 터보 엔진으로 145마력, 36.7㎏·m를 낸다. 처음에는 이 수치만 보고 큰 덩치를 잘 이끌지 걱정됐는데 웬걸, 힘이 차고 넘친다. 6단 수동변속기는 이동거리가 짧은 숏 스트로크 타입이고, 클러치는 폭신폭신하고 부드럽다. 덕분에 예상보다 운전이 쉽고 기어가 착착 물려 들어가는 느낌이 좋다. 자동변속기가 더해지면 좋겠지만, 이 정도도 충분히 훌륭하다.
계기반에는 시프트업 인디케이터가 장착돼 변속시기를 친절하게 알려준다. 초록색 화살표가 나오면 기어를 올리라는 건데, 실제로는 이보다 살짝 늦게 변속을 하는 게 파워 있는 주행에 도움이 된다.
높은 차체 덕에 시야는 엄청나게 넓다. 승용차를 타다 이 차를 타니 46인치 TV를 86인치 TV로 바꿔 보는 것 같다고 할까. 시야가 높아지니 주위 차들의 움직임이 한눈에 보인다. 누가 끼어들기 금지구간에서 얌체운전을 하려는지, 누가 담배꽁초를 몰래 버리는지 다 알아챌 수 있다.
운전할 때 한 가지 유의할 건 승용차보다 사각지대가 크다는 점이다. 특히 운전석 뒤쪽이 패널로 막힌 탓에, 차선 변경 때 고개를 돌려 확인하는 ‘숄더 체크’를 하더라도 옆으로 들어오는 차가 안 보이는 경우가 생긴다. 이 때문에 차선 변경 전에 사이드 미러와 함께 그 아래에 마련된 광각 보조 미러를 잘 살피는 게 필요하다.
승차감은 전반적으로 괜찮지만 뒷바퀴는 통통 튄다. 리프 스프링 타입의 리어 서스펜션 특성상 당연한 것 같기는 한데, 짐을 가득 실었을 경우에 어떤 승차감을 보여줄지 궁금해진다. 벤츠 스프린터의 경우 운전석 시트에 충격 흡수장치를 별도로 마련해 승차감을 보완한다. 마스터에 장착된다면 역시 효과가 있을 것이다.
한 가지 아쉬운 건 좁은 시트 뒤 공간이다. 적재능력에 비중을 둔 탓에 운전석 시트는 아주 조금 뒤로 젖혀질 뿐이고, 조수석은 아예 움직이지 않는다. 운전석과 조수석 가운데 자리한 시트는 암레스트로 쓰라고 앞으로만 젖힐 수 있게 해 놨다. 조수석에 탄 딸내미는 “차가 커서 실내도 넓을 줄 알았는데…”라며 연신 투덜댄다. 장거리 주행에서는 불편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앞으로 선보일 캠핑카는 이런 단점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실내를 어떻게 구성하느냐에 따라 마스터의 광활한 적재공간은 빛을 발할 것이다. 마침 국내 중소기업이 번개 같이 르노 마스터 캠핑카를 내놨다고 하니 한 번 살펴봐야겠다.
마스터의 적재함 크기(길이×너비×높이)는 S가 2505×1705×1750㎜(8.0㎥)이고, L은 3015×1705×1940㎜(10.8㎥)다. 반면 포터 다용도 탑차의 적재함 크기는 2835×1700×1470㎜이고, 시티밴은 각각 3000×1660×1770㎜이다. 또, 그랜드 스타렉스 3인승 밴은 2375×1620×1340㎜다. 쏠라티는 적재함 사이즈가 안 나왔지만 총 용적은 12.7㎥다.
적재중량의 경우 마스터는 1200~1300㎏인데, 포터는 1000㎏, 그랜드 스타렉스는 600~800㎏, 쏠라티는 1300㎏이다. 마스터의 적재중량은 쏠라티와 비슷하지만 가격은 쏠라티 윈도우 밴(6390만원)의 절반 수준인 2900만~3100만원에 불과하다. 포터의 경우 다용도 탑차가 1992만원, 시티밴이 2326만원이고, 그랜드 스타렉스 3인승 밴은 2110만~2430만원이다. 비교해 보니 르노 마스터의 가성비가 꽤 좋다.
마스터는 그랜드 스타렉스보다 적재함의 높이가 훨씬 높기 때문에 쓰임새가 훨씬 다양하다. 예를 들어 의류나 꽃, 빵처럼 눌리면 안 되는 화물의 경우 적재함 높이가 높을수록 많이 실을 수 있어 유리하다. 그밖에도 슈퍼마켓, 전자제품 대리점, 구급차, 현금수송, 택배업체 등 활용처가 무궁무진하다. 물론 차체 높이가 높은 만큼 지하주차장의 이용에 제약이 따르는 건 옥의 티다.
마스터 L의 연비는 도심 10.8㎞/ℓ, 고속도로 10.2㎞/ℓ, 복합 10.5㎞/ℓ다. 정지 때 엔진이 멈추는 오토 스톱 앤 스타트를 비롯해 에코 모드, EMS 등이 장착돼 도심에서의 연비가 더 좋다. 이번 시승에서는 복합모드와 똑같은 10.5㎞/ℓ를 기록했다.
마스터는 르노삼성 홈페이지가 아닌 르노 한국 사이트를 통해 정보를 접할 수 있다. 이 사이트에 트위지, 클리오 등 르노 엠블럼을 단 차들이 모여 있다. 사이트는 르노삼성과 별개로 운영하지만, 구입과 서비스는 르노삼성의 네트워크를 이용한다. 무엇보다 차체와 부품 모두 3년 또는 10만㎞까지 제공되는 보증이 강점이다. 135만원을 추가로 지불하면 5년 또는 16만㎞까지 연장할 수 있다. 현대차의 경우는 차체/일반 부품은 2년/4만㎞, 엔진 및 동력전달 부품은 3년/6만㎞로 차이가 있다.
마스터의 출발은 좋다. 출시 한 달여 만에 500대 넘게 계약되면서 올해 도입 물량은 이미 동이 났다. 물론 진검승부는 승합 모델이 출시되는 내년부터다. 어린이집 버스나 기업체의 법인 수요 등을 잡을 수 있는 데다, 승합 모델을 기반으로 나올 캠핑카의 수요도 상당하기 때문이다. 마스터의 향후 판매추이에 따라 그보다 체구가 작은 ‘캉구’나 ‘트래픽’의 도입도 가능해질 수 있다. 마스터는 포터, 그랜드 스타렉스, 쏠라티의 틈새를 묘하게 잘 파고들 수 있을까. 진짜 승부는 이제 시작이다.
임의택 기자 (ferrari5@rpm9.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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