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이 온통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에 빠져 있을 때, 난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에서 ‘맘마미아2’에 뒤늦게 빠져 들었다.
“I've been cheated by you since I don't know when. so I made up my mind it must come to an end~”(난 당신에게 속아왔어요.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게. 그래서 난 결심했죠. 끝을 내야 한다고)
맘마미아2를 세 번 정도 봤을 즈음, 드디어 목적지인 미국 텍사스 주 샌안토니오에 도착했다. 엠마 호텔 로비에는 메르세데스-벤츠의 신형 GLE를 취재하기 위해 전 세계의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숙소에 도착한 기자들은 “재미있는 걸 보여주겠다”는 메르세데스-벤츠 관계자의 말에 호텔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어둠 속에 홀로 서 있던 신형 GLE는 춤을 추기 시작했다. 전자음악에 맞춰 차체를 위 아래로 들썩 거리며 흔드는 GLE는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는 걸까?
메르세데스-벤츠 최초의 SUV는 21년 전 탄생했다. 전설적인 오프로더인 G-클래스 이후 ‘스포츠와 여가를 위한 편안하고 스포티한 자동차’를 콘셉트로 1997년 데뷔한 1세대 M-클래스(코드명 W163)가 그 주인공이다. 1세대 M-클래스는 벤츠 최초의 미국 공장(앨라배마 주 투스칼루사)에서 생산됐다는 점 외에도 영화 ‘쥬라기공원-2’에 등장하면서 더욱 눈길을 끌었다.
이 차는 그 후 2005년 2세대 M-클래스(W164), 2011년 3세대 M-클래스(W166)로 진화했고, 2015년에는 새로운 명명체계에 따라 ‘GLE’로 개명했다. 2016년 말까지 투스칼루사 공장에서는 GLE와 GLE 쿠페, 대형 SUV GLS가 총 240만대 정도 생산됐으며, 7종류로 늘어난 벤츠 SUV 라인업은 현재까지 전 세계적으로 500만대 넘게 판매됐다. 이 500만대 중 M클래스와 GLE가 200만대 이상 차지한다.
신형 GLE는 구형과 비교해 전장 94㎜, 전폭 12㎜, 전고 2㎜가 커졌고, 휠베이스는 무려 80㎜가 늘어났다. 늘어난 휠베이스 대부분을 뒷좌석에 몰아주면서 구형보다 레그룸이 69㎜나 확장됐다. 2열 시트는 완전히 전동식으로 조절된다. 좌우 좌석을 개별적으로 100㎜까지 슬라이딩시킬 수 있고, 머리 받침대도 스위치로 조절 가능하다. 벤츠는 2열 전동시트가 SUV 중 최초라고 하는데, 앞서 랜드로버 뉴 디스커버리는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으로도 좌석변경이 가능한 기능을 선보인 바 있다.
기본 적재용량은 825ℓ, 2열 시트를 접으면 2055ℓ까지 늘어난다. 너비가 구형보다 72㎜ 넓어졌고 깊이는 최대 105㎜ 늘어났다. 늘어난 적재함에는 구형과 달리 3열 시트를 옵션으로 장착할 수 있다.
신형 GLE의 특징은 E-액티브 바디 컨트롤과 반자율 주행기능, 가변형 4매틱, 새로운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으로 요약할 수 있다.
벤츠가 세계 최초로 선보이는 E-액티브 바디 컨트롤은 네 개의 휠 스프링과 감쇠력을 각각 개별적으로 조절하는 기능이다. 앞서 신형 GLE가 춤을 추듯 움직이는 모습은 바로 이 기능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감쇠력은 오디오의 이퀄라이저처럼 터치스크린에서 강도를 올리면 되는데, 그 덕분에 롤링과 피칭, 스쿼트 현상에서 좀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
놀라운 건 ‘커브(CURVE)’ 기능이었다. 보통의 차들은 코너링에서 기울어짐을 감지하고 복원시켜 주는 방식을 택한다. 한데 신형 GLE의 커브 기능을 선택하면 코너링을 할 때 서스펜션을 조절해 차체가 회전방향으로 미리 기울어지면서 원심력을 줄인다. 차체는 모터사이클 같이 차체가 살짝 기울어지고, 마치 ‘댄싱 퀸’처럼 멋지게 돌아나간다. 커브 기능은 레벨 1부터 3까지 원하는 각도만큼 조절이 가능하다.
이 장비의 개발자인 켐 시몬은 “코너 탈출속도는 커브 기능 작동여부에 상관없이 똑같다”고 설명한다. 그는 그 이유를 확실히 설명하지 못했지만, 이 장비의 작동원리와 기능을 잘 생각해보면 답이 나온다. GLE처럼 차고가 높은 SUV의 경우 고속 선회성능보다 주행안전성이 더 중요한데, ‘더 빠르게 달리기 위함’이 아니라 ‘더 안전하게 달리기 위함’이 바로 ‘커브’ 기능의 존재 이유가 아닐까.
또 하나 재미있는 건 ‘프리 드라이빙 모드’다. SUV를 모는 이들이 흔히 하기 쉬운 실수 중 하나가 4륜 구동 기능만 믿고 험로에 들어서는 일인데, 그러다가 모래나 진흙길에 빠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GLE의 프리 드라이빙 모드는 차가 상하로 조금씩 움직이면서 흙길에 빠진 발을 하나하나 털고 나오듯 헤쳐 나올 수 있도록 돕는다. 이 기능은 오르막 60㎜, 내리막 60㎜ 등 총 120㎜ 범위에서 작동한다.
혁신적인 이 기능들은 48V 마일드 하이브리드 시스템 덕분이다. 기존 자동차들의 경우 12V 전압을 쓰는데, 48V로 전압을 높이면 엔진 출력을 에어컨이나 워터펌프로 빼앗기지 않아도 돼 연비와 출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
벤츠는 통합 스타터 제너레이터(ISG)라고 불리는 장비에 모터와 리튬 이온배터리, 전동 슈퍼차저를 조합해 벹트 구동 시스템을 없앴으며, 덕분에 V6에서 직렬 6기통으로 바꿨음에도 엔진의 길이는 짧아졌다. 무엇보다 48V의 여유로운 전압 덕에 엔진 출력 손실 없이도 ‘커브’나 ‘프리 드라이빙 모드’ 같은 첨단 기능 구현이 가능해진 게 가장 돋보인다. 벤츠의 48V 시스템은 앞서 비슷한 시스템을 적용한 타 회사보다 앞선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디젤인가, 가솔린인가
이번 시승회에 마련된 모델은 4매틱을 채택한 400 d와 300 d, 450(가솔린) 등 세 가지다. 이 외에도 350/350 4매틱은 미국 전용으로 나오고 유럽에서는 350 d 4매틱도 마련된다. 우리나라에 선보일 모델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먼저 만난 차는 400 4매틱. 최고출력 330마력(3600~4000rpm)에 최대토크 71.4㎏·m(1200~3000rpm)를 내는 엔진을 얹었다. 구형의 V6 엔진은 직렬 6기통으로 바뀌었고, 최고출력은 72마력, 최대토크는 8.2㎏·m가 상승했다.
요즘 벤츠 디젤 엔진의 정숙성은 더 말할 나위 없이 훌륭하다지만, 이 엔진은 정말 가솔린과 구분하기가 힘들다. 최대토크를 내는 범위가 매우 낮게 설정되어 있는데, 이후의 펀치력은 최고출력 범위에서 커버한다.
가솔린 모델인 450 4매틱은 367마력, 51.0㎏·m의 엔진도 출중하지만, 여기에 48V 마일드 하이브리드 시스템의 EQ 부스트가 22마력의 출력과 25.5㎏·m를 더했다. 기존 가솔린 하이브리드의 복잡한 구조 없이도 좋은 연비와 정숙성을 낼 수 있다는 게 가장 매력적이다. 이 엔진들은 모두 9단 자동변속기와 만난다.
신형 GLE는 구동 토크를 앞뒤 50:50으로 고정한 트랜스퍼 케이스가 장착되고, 6기통 이상의 엔진에는 전자식 가변형 4매틱이 옵션으로 제공된다. 가변형 4매틱은 멀티 디스크 클러치가 적용된 트랜스퍼 케이스의 작동으로 각각의 축에 0%에서 100%까지 달라지는 구동력을 전달한다. 과거 벤츠의 4매틱은 일정 범위 이내에서 구동력이 달라졌고 어느 한 쪽에 100%를 몰아줄 수는 없었는데, 그 점을 이번에 해결했다.
◆멋지고 똑똑한 MBUX
실내에서는 두 개의 12.3인치 MBUX 디스플레이가 압권이다. E클래스, S클래스의 것과 비슷한 형태지만, MBUX가 적용된 건 신형 A클래스에 이어 두 번째다. 오버헤드 콘솔에 달린 카메라는 운전자나 조수석 탑승자의 동작을 인식해 터치스크린이나 터치 패드를 조작할 때 디스플레이가 바뀌고 개별 버튼을 부각시킨다. 영리한 카메라는 운전자가 조작하는지, 조수석 탑승자가 조작하는지도 파악해 구분해서 반응한다. 이 기능은 벤츠에서 최초로 적용된 것이다.
클러스터는 모던 클래식, 스포츠, 프로그레시브, 디스크릿 등 4가지. 해상도가 매우 선명할 뿐 아니라 기분에 따라 여러 종류의 클러스터를 맛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증강현실(AR) 기술을 적용한 내비게이션도 ‘신박’하다. 전면 카메라가 영상을 수집한 후 교차로 같은 곳에서 이미지를 내비게이션에 보여줌으로써 목적지를 좀 더 쉽게 찾을 수 있다.
◆믿고 달릴 수 있지만 만능은 아니다
세계 최고 수준인 벤츠의 반자율주행 기능은 GLE에서도 돋보인다. 능동형 디스턴스 어시스트 디스트로닉은 실시간 교통정보를 받아 주행속도를 조절하는 기능으로, 독일에서는 작동되는데 미국은 아직 적용 전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실시간 교통정보와 연동되지 않으면 작동되지 않을 수 있다. 능동형 테일백 어시스트는 새롭게 적용된 것으로 시속 60㎞ 이내에서 앞차와의 간격을 유지하며 따라간다. 심지어 구급차가 나타날 경우 차선 가장자리로 이동해 주행을 이어가는 능동형 조향 어시스트도 적용돼 있다.
이렇게 완벽에 가까운 안전장비를 갖추고 있지만, 모든 차가 그렇듯 모든 걸 차에 맡길 수는 없다. 내가 탄 시승차는 갑작스러운 차선변경으로 인해 뒤차와 추돌할 뻔했는데, 다행스럽게도 뒤차가 급정거해서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 동승석에 앉아있던 내가 사고를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다른 차도 마찬가지였다. GLE의 능동형 브레이크 어시스트는 마주 오는 차가 있을 경우 운전자가 중앙선을 넘기 전에 제동 개입이 이뤄진다. 그런데 실제 이와 비슷한 상황이 다른 시승차에서 일어났는데, 운전미숙으로 차선을 넘는 순간, 동승자가 스티어링 휠을 잡아당겨 사고를 막았다. 아무리 안전한 벤츠라도 이런 사고까지 미연에 막기는 힘들다.
벤츠 뉴 GLE는 전작과 비교해 엄청난 변신을 이뤄냈다. 데뷔는 2019년 초로 예정되어 있고 아직 정확한 시기와 가격은 정해지지 않았다.
짧은 미국 출장일정을 보내고 다시 비행기에 올랐는데, 문득 벤츠 뉴 GLE가 떠올랐다. 그리고 귓가에는 다시 맘마미아의 OST가 아른거렸다.
“Mamma mia, here I go again. My my, how can I resist you?~”(이런, 또 사랑에(벤츠에) 빠져버렸네요. 어떻게 거부할 수 있겠어요~)
임의택 기자 (ferrari5@rpm9.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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