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ENT 영화] ‘제이티 르로이’ 실체 없는 실화! 어쩌면 버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에...

발행일자 | 2021.01.18 15:06

저스틴 켈리 감독의 <제이티 르로이(J.T. LeRoy)>는 탈출하려다가 더 깊이 들어가는 상황에 처한 사람의 안타까운 질주를 담고 있다. 뛰어난 작가가 소설 속 등장인물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것처럼 현실에 투영된 소설 속 인물도 자신의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다는 착각은, 관객의 호기심을 이끌어낼 수도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로라(로라 던 분)의 이야기는 실체 없는 실화라고 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어쩌면 자신이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유일한 방법이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라는 점에 공감하면 관객은 더 이상 감정이입할 수도 그렇다고 빠져나올 수 없을 수도 있다. 어쩌면 이때가 로라에게 진짜 몰입하게 되는 시간일 수도 있다.

‘제이티 르로이’ 스틸사진. 사진=영화사 빅 제공
<‘제이티 르로이’ 스틸사진. 사진=영화사 빅 제공>

◇ 필명은 예명이 아닌 아바타? 나를 상징하는데 머물지 않고, 새로운 나를 창조한다?
 
<제이티 르로이>는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된 이야기이다. 폰 섹스가 인물을 만들어내는 광기 어린 과정의 일부라고 말하는 로라는, 그냥 과감한 실행력을 가진 작가 정도로 보일 수도 있다. 처음에는 그렇다.
 
자신이 제이티 르로이라는 것을 숨기는 모습에는 필명을 쓰는 작가가 느끼는 은밀함이 담겨 있다. 하지만 작가가 아니더라도, 아이디나 닉네임을 본명보다 더 많이 사용하는 우리 시대의 많은 사람들은 충분히 공감할 것이다. 로라 스스로는 제이티라는 필명을 예명보다 아바타라고 느끼는데, 닉네임으로 원래의 자신을 숨기고 새로운 자아를 창조한다고 느끼는 사람들과 닮아 있다.

‘제이티 르로이’ 스틸사진. 사진=영화사 빅 제공
<‘제이티 르로이’ 스틸사진. 사진=영화사 빅 제공>

◇ 보여주고 싶은 마음 vs. 숨기고 싶은 마음
 
<제이티 르로이>에서 로라는 자신을 내보이고 싶은 마음과 세상을 모두 속이는 쾌감을 모두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소설 속 주인공이 소설 속에서 이름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현실 세계의 사람들이 볼 때는 누구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는 익명성을 가진 것처럼, 로라 또한 그러했을 수도 있다
 
이런 모습은 자신의 작품에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작품에 빙의해 그 작품 뒤에 숨은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즉, 자신이 작가라는 것을 밝히며 작품 앞에 서는 게 아니라, 누구인지 알 수 없게 작품 뒤에 숨은 것일 수 있다.

‘제이티 르로이’ 스틸사진. 사진=영화사 빅 제공
<‘제이티 르로이’ 스틸사진. 사진=영화사 빅 제공>

어쩌면 뒤에 숨었기 때문에 더욱 자신을 드러내는 글을 썼을 수도 있고, 그래서 위험한 진실이 묻혔을 수도 있다.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쓰인 소설은 그런 뉘앙스를 더욱 진하게 전달된다.
 
로라는 사바나(크리스틴 스튜어트 분)에게 제이티처럼 행동하고 사진 찍어 달라고 요청을 한다. 이는 자신이 만든 완벽한 허구의 세상을 이젠 허구가 아닌 진짜의 세계로 만들려는 의도로 해석할 수도 있다.

‘제이티 르로이’ 스틸사진. 사진=영화사 빅 제공
<‘제이티 르로이’ 스틸사진. 사진=영화사 빅 제공>

로라는 그렇게 되면 완벽하게 가상의 세계 속으로 숨어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일 수도 있다. 온전히 새로운 세상에서 완벽한 자아를 만들고, 그 안에 숨어 편안하고 은밀하게 사람들의 시선을 받을 수 있다고 여겼을 수도 있다.
 
로라가 소설 속에서 제이티를 만들었다면, 그 제이티를 로라가 현실에서 재현한 게 사바나라고 볼 수 있다. 로라가 봤을 때는 스스로 의도한 허구의 세상이라면, 사바나의 입장에서는 남에 의해 빠져든 허구의 세상이라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우리가 로라가 돼 살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고 해고, 사바나가 돼 살게 될 위험성은 상대적으로 클 수 있기 때문이다.

‘제이티 르로이’ 스틸사진. 사진=영화사 빅 제공
<‘제이티 르로이’ 스틸사진. 사진=영화사 빅 제공>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사바나는 제이티에 동기화된다. 본연의 사바나는 점차 사라지고 제이티만 남는 것처럼 보인다. 거짓이 진실보다 더 진실 된다고 믿는 로라, 아니면 그렇게 만들 수 있다고 여기는 로라가 무섭게 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로라는 다른 사람을 완전히 자기 자신으로 만들고 싶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반대로 제이티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 안에 있는 제이티를 사바나에게 투영했을 수도 있다.

‘제이티 르로이’ 스틸사진. 사진=영화사 빅 제공
<‘제이티 르로이’ 스틸사진. 사진=영화사 빅 제공>

◇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던 이유는 뭘까? 어쩌면 버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에...
 
<제이티 르로이>에서 로라는 교활하고 불손하다고 보인다. 꼭 저렇게 해야만 했냐는 비난을 관객은 로라에게 어렵지 않게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로라가 저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걸 이해하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다.
 
자기 자신으로 살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이 되었어야 하는 이유, 자신이 만든 위대한 업적을 자신의 이름으로 드러낼 수 없는 이유에 공감하면, 로라가 누구보다도 불쌍하게 생각되기도 한다. 어쩌면 로라는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경우 결코 버틸 수 없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제이티 르로이’ 스틸사진. 사진=영화사 빅 제공
<‘제이티 르로이’ 스틸사진. 사진=영화사 빅 제공>

온전한 나로 살지 못하는 로라에게 제프(짐 스터게스 분)가 있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있는 그대로를 인정한 제프의 사랑이 없었으면 로라는 뛰어난 업적을 내기는커녕 더 망가지기만 했을 수도 있다.
 
제프의 사랑이 있기 때문에 버틸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는데, 하지만 제프의 사랑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로라를 로라 자신으로 살지 못하게 만들었을 수 있다. 세상의 많은 로라들에게 이 영화가 위로가 되기를 바란다.
 
천상욱 기자 (lovelich9@rpm9.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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