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 때도 그랬지만 타면서도 알쏭달쏭 했다. 이것이 과연 5인가 7인가. 베이스는 7이라면서 이름은 왜 5시리즈 그란투리스모인가. 난해한 패키징이지만 차는 확실히 좋다. 어떤 면에서는 5시리즈 보다 더 오너 지향적이다. 결국 탈 만한 BMW가 하나 더 늘어난 것으로 받아들였다.
글 / 한상기 (rpm9.com 객원기자)
사진 / 민병권 (rpm9.com 에디터)
요즘 들어서는 한 번에 정의하기 어려운 차가 많아졌다. 이것저것 섞이면 대충 크로스오버라고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부족한 경우가 있다. BMW 5시리즈 그란투리스모가 바로 이런 경우다. 크로스오버에서 한 번 더 섞은 크로스오버라고 할까. 요기저기 둘러보고 운전을 해봐도 정확한 정체를 모르겠다. 딱히 크로스오버라고 하기도 뭐하다.
이런 것을 보면 확실히 아이디어가 중요하다. 그란투리스모에는 이전에 없던 기술이 있는 게 아니다. 다 있는 것 갖고 만든 차다. 그런데 좋은 아이디어에 따른 패키징으로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 냈다. 컨셉트카 시절에는 프러그레시브 액티비티 세단이었다. 대충 해석하면 진보적인 활동적인 세단. 좋은 뜻이다. BMW는 차도 잘 만들지만 말도 잘 갖다 붙인다.
앞 범퍼부터 A 필러까지만 뚝 잘라서 보면 7시리즈다. 돼지코를 연상시키는 키드니 그릴이나 눈매, 보닛 등이 7에 거의 흡사하다. 7이 베이스라고 했는데 생각보다 차는 작아 보인다. 하지만 수치상으로는 7에 더 근접하다. 전장×전폭×전고와 휠베이스를 보면
그란투리스모 - 4,998×1,901×1,559mm, 휠베이스 3,070mm
7시리즈 - 5,072×1,902×1,479 mm, 휠베이스 3,070mm
5시리즈 - 4,899×1,860×1,464mm, 휠베이스 2,968mm이다.
보다시피 차체 사이즈에서는 5보다는 크고 7보다는 작다. 이름은 5시리즈 그란투리스모인데 7스러운 차체 사이즈를 갖고 있다. 그러니까 5와 7에 모두 발을 담그고 있는 셈이다. 그뿐인가. 뒤를 보면 X6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다. 전고는 X6 보다 낮아서 세단에 가깝다. 하지만 루프 라인이나 트렁크 리드의 처리를 보면 세단이라고 우기기도 뭐하다. 트렁크 리드를 보면 해치백과 SUV의 중간적인 모습이다.
19인치 알로이 휠은 현란한 디자인이다. 끝이 두 개로 갈라진 5스포크 디자인 사이마다 색이 다른 스포크를 추가했다. 알로이 휠의 디자인마저 복합적이다. 타이어는 앞-245/45R, 뒤-275/40R 사이즈의 피렐리 P-제로이다.
실내로 들어서면 7에 탔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7이 베이스니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같은 점 보다는 다른 점을 찾는 게 더 빠르다. 일단 눈에 띄는 것은 송풍구 밑에 길쭉한 수납함이 추가된 것이다. 그냥 세단은 아니고 복합적인 성격의 차니 수납함을 하나라도 더 추가하고자 했던 것 같다. 운전대 왼쪽에 있는 네모반듯한 수납함도 요긴하게 쓸 만큼 넉넉하다. 연한 색의 우드그레인은 BMW에서 자주 못 보던 것이다.
시트는 5시리즈 보다는 약간 단단한 편이다. 시트에는 냉난방 3단계 기능도 있고 모든 게 전동이다. 시트 포지션은 5cm가 높아졌다. 운전석 도어 트림에는 2열의 블라인드까지 올리고 내릴 수 있는 버튼도 있다. 거기다 문 4개는 물론 트렁크까지 파워 클로징이 적용돼 있다. 그러니 쾅 하고 힘줘서 닫을 필요 없이 살짝만 갖다 대면 알아서 도어를 끌어당겨 준다.
문이 열렸을 때 도어유리의 상향 원터치가 안 되는 것은 세심한 배려이다. 유리를 원터치로 올리는 중에도 문이 열리면 즉시 멈춰 버린다. 안전을 위해서다. 대신 하향 원터치는 도어 개폐 유무에 상관없이 된다. 그리고 유리와 마찬가지로 문이 열려 있으면 후진도 되지 않는다. 후진하다 문 열면 차는 멈추고 기어는 자동으로 P에 물린다.
서라운드 뷰는 차 전체를 위에서 내려다 보는 듯하다. 화질도 좋아서 꼭 그림 같다. 분할 화면 한 쪽에는 그래픽으로 물체의 접근 상황도 표시돼 모니터만 잘 본다면 주차에 어려움을 겪을 일이 별로 없다.
그리고 기어 레버 뒤에 있는 카메라 버튼을 누르면 전방 좌우 45도 상황이 큰 화면으로 표시된다. 그란투리스모 사이즈라면 앞바퀴 좌우의 시야가 제한될 때가 많다. 이럴 때 요긴한 장비다.
2열도 7처럼 넓다. 2열에는 멋을 낸 도어 트림의 곡선이 가장 눈에 띈다. 가죽과 메탈을 혼재한 도어 트림은 그 디자인만으로도 충분히 고급스럽다. 2열 양쪽에도 좌우의 블라인드를 모두 내릴 수 있는 버튼이 있다. 즉 윈도우 버튼만 4개이다. 거기다 2열을 위한 전용 공조 장치도 있다.
그란투리스모는 모두 기존에 있던 재료로 만든 것이다. 처음 선보이는 것은 트렁크 시스템이다. 2단으로 열리는 트렁크와 해치는 참으로 독특하다. 일단 트렁크 왼쪽 버튼을 누르면 세단처럼 열린다. 물론 세단과는 좀 다르다. 입구가 네모반듯해 큰 물건을 넣기에는 어려워 보인다.
이럴 때 트렁크 우측 버튼을 누르면 해치 전체가 열린다. 마치 SUV처럼 크게 열린다. 트렁크는 해치가 열리는 것에만 전동 개폐가 적용된다. 트렁크의 칸막이는 버튼을 당기고 2열 시트를 접으면 두 개가 자동으로 폴딩된다.
엔진은 코드네임 N55의 3리터 트윈 터보 가솔린이다. 출력은 306마력으로 이전의 N54와 동일하지만 최대 토크가 나오는 시점이 더욱 낮아졌다. N55는 최대 토크가 1,200 rpm에서 나온다. 이는 최신의 디젤보다도 발생 시점이 빠른 것이다. 변속기는 ZF의 8단이 기본이다. 엔진과 변속기 모두 동급 최고의 경쟁력이다.
535i 그란투리스모의 0→100km/h 가속 시간은 6.3초이다. 같은 엔진의 535i는 6.1초인데 실제로는 순발력 면에서 차이를 느끼기 힘들다. 고속에서는 차이가 느껴진다고 해야겠지만 저중속에서는 5시리즈만큼 기민하게 움직인다. 아니,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그란투리스모 쪽이 더 오너 지향이다.
2~4단에서 낼 수 있는 최고 속도는 88, 140, 177km/h, 5단에서도 234km/h까지 거침없이 가속된다. 6단에서 속도 제한이 걸리는 시점까지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6단 6,100 rpm에서는 HUD에 255km/h가 찍힌다. 달려나가는 걸 보면 이 이상도 가능할 기세다. 8단으로 100km/h를 달리면 회전수는 1,500 rpm을 조금 넘을 뿐이다.
8단이 적용되면서 톱 기어의 기어비를 더욱 낮출 수 있고 이는 항속 시 연비나 승차감 향상에 유리하다. ZF의 8단은 굳이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성능이 뛰어나다. 근데 1억이 넘는 차에 시프트 패들이 없는 건 좀 그렇다. 7이야 그렇다 쳐도 그란투리스모의 움직임을 보면 시프트 패들이 있어야 어울린다.
서스펜션은 컴포트와 노멀, 스포트, 스포트 플러스 4가지 모드가 제공된다. 이중 노멀이 가장 무난하다. 처음에는 말랑한 컴포트가 좋았는데, 조금 타다 보니 굴곡 있는 도로에서는 다소 출렁거리는 면이 있다. 결국 노멀이 두루두루 만족하는 세팅이다. 스포트로 바꾸면 댐퍼의 세팅은 물론 스티어링 기어비와 파워트레인의 반응까지 달라진다. 어느 세팅으로 해도 언더스티어가 적고, 코너를 감아 돌아가는 맛이 있다. 브레이크는 초기 응답성이 좋다. 강하게 밟는 만큼 확실하게 선다. 하지만 초기의 강한 힘이 끝까지 지속되는 면은 약간 모자란 편이다.
그란투리스모에 탑재된 ACC는 멈출 때까지 작동하는 3세대이다. 전방의 물체를 인식해 차간 거리를 조절하고 완전히 멈추기까지 한다. 따라서 고속도로는 물론 신호등 있는 국도에서도 사용하기가 좋다. 다른 3세대와 다른 것은 멈춘 다음에도 ACC 기능이 해제가 안 된다. 지금껏 경험한 3세대 ACC는 멈추면 기능이 해제됐다.
그란투리스모는 운전하면서도 묘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7처럼 안락하고 편안한데 움직임은 5보다도 스포티한 구석이 있다. 가격도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 그란투리스모의 가격은 일반형이 7,850만원, 시승차인 익스클루시브는 1억 510만원이다. 꽤 큰 가격 차이다. 일반형에 없는 장비를 대략 살펴보면 파워 클로징, 전자식 댐핑 컨트롤, 어댑티브 드라이브, 4존 에어컨, ACC, 어댑티브 헤드램프 등이다. 7,890만원은 떡밥이면서 5시리즈 값에 7같은 차를 살 수 있는 기회인 셈이다.
일반형은 528i(6,790만원) 보다는 1천만 원이 비싸고 535i(9,590만원) 보다는 2천만 원 가까이 싸다. 그리고 국내의 7시리즈 중에서 가장 싼 740i(1억 3천만 원)과는 격차를 보이고 있다. 5와 7, 그란투리스모에서 갈등하다보면 이 중 하나에 걸리지 않을까. 선택이 많다는 것은 다른 브랜드에게 고객을 뺐길 확률이 낮다는 뜻도 된다. 그란투리스모의 존재 이유다.
© 2024 rpm9.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