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히 SUV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마주하고 보니 키 큰 해치백 같았던 BMW X1은 조금 신선했다. 그런데 불현듯 밀려오는 기시감. 뭐지? 어디서 봤지? 그게 바로 닷지 캘리버였다.
캘리버 역시 사진으로 보기에는 SUV인데 실제로는 생각만큼 높지 않다. 혹시나 해서 비교 해보니 X1과 캘리버는 기본 구동방식이 달라 휠베이스에서 차이가 날 뿐 전장, 전폭, 전고가 비슷하다. 차체크기와 비례로 인해 비슷한 느낌이 든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캘리버는 SUV룩의 해치백이다. 어디서는 ‘작은 SUV’라고도 하는데, 크라이슬러에서는 ‘MAV(Multi Activity Vehicle)’라고 칭했다. 아무튼, 일반 승용차보다는 지상고가 높고, 바퀴도 커 보인다. 이런 차가 대중적인 컴팩트 세단이었던 닷지 네온의 후속으로 등장한 것은 파격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캘리버가 미국 시장에 출시된 것은 2007년 1월. 우리나라에는 그 해 연말에 상륙했다. 이종격투기 선수인 데니스 강이 신차발표회 때 모델로 등장했던 것이 기억난다. 덕분에, ‘작지만 강한 차’라는 인상을 제대로 남겼다. 차의 디자인과 패키지는 물론, 해외 홍보문구인 “Anything but cute”와도 잘 맞았다.
외관 못지않게 강력한 한방을 먹인 것은 실내였다. 다른 차들처럼 억지로 가죽 흉내를 내는 대신, ‘플라스틱이 어때서?’라는 듯 아예 각을 주어 꺾은 대시보드가 압권이었다. 부딪치면 아플 것 같은 생각도 들었지만 그 자세만큼은 글로브박스의 냉장 음료보관함보다도 쿨 했다. 앞으로 젖히면 아이팟을 꼽을 수 있는 홀더가 나타나는 팔걸이, 실내등 겸용의 탈착식 손전등에서도 젊은 감각이 돋보였다.
4년만에 캘리버를 다시 만나면 팔걸이 홀더에 아이폰을 꽂아보고 싶었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그 사이 실내가 크게 바뀐 탓이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이 딱 맞다. 젊음을 지나치게 강조했던 실내는 결국 훨씬 보편 타당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더 많이 팔릴 모습이 된 것은 분명한데, 기가 꺾인 젊은 이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도 든다.
흰색바탕으로 패션을 쫓는 듯 했던 계기판도 점잖게 바뀌었다. 연료계 아래쪽의 액정은 차량 설정 등 다양한 기능을 지원하는데, 계기판 사이의 막대기를 눌러야 하는 불편한 방식은 그대로 유지했다. 총 3단 구성이었던 글로브박스는 가장 상단의 진짜 ‘장갑 보관용’ 수납함이 사라지면서 2단 구성이 되었다. 대신 대시보드 가운데 상단에는 덮개 달린 수납공간을 마련했다.
음료용기가 굴러다니지 않도록 아예 홈을 파놓은 글로브박스 속 칠존(Chill Zone™)은 그대로다. 바닥 콘솔의 큼지막한 컵 홀더에는 조명도 켜진다. 그리고 그 주위에도 잡동사니를 넣을 수 있는 수납 칸을 배치해 편하게 쓸 수 있다. 다만, 팔걸이 수납함은 작정하고 뒤로 빼놓았기 때문에 뒷좌석 가운데 부분이 좁은 점은 감안해야 한다.
2단으로 구성된 팔걸이 덮개에서는 아이팟 홀더 기능이 사라졌지만 미련이 남은 듯 배선 홈을 파놓았다. 그래도 오디오의 헤드유닛에 AUX, USB단자가 있고 에어컨 조작부 아래쪽으로 핸드폰이나 휴대용기기를 올려놓기 좋은 고무마감 선반과 12볼트 전원 소켓을 배치했기 때문에, 팔걸이까지 선을 끌고 올 일은 잘 없을 것 같다.
헤드유닛에는 20기가 하드디스크가 내장돼있어서 많은 음악을 때려 넣을 수 있는데다가 큼지막한 터치스크린도 달렸다. 구형의 이미지와는 천지차이다. 차 값에는 빠져있지만, 원한다면 이 유닛을 그대로 쓰면서 내비게이션 기능도 추가할 수 있다. 그러면, 메뉴 버튼을 길게 눌렀을 때 한글 내비게이션이 나타났던 신형 그랜드체로키의 것과 같아지나 보다. 주차센서가 없으니 아예 후방카메라 기능과 함께 공사하면 좋겠다. 블루투스와 음성인식 기능은 빠졌다. 언뜻 보면 오디오 리모컨이 없는 것 같지만 스티어링 휠의 스포크 뒤에 달려있다. 미국차답게 크루즈컨트롤도 빼먹지 않았다.
에어컨은 수동이지만 열선 시트는 있다. 그리고 운전석 방석이 전동으로 움직인다. 앞뒤거리와 높이는 물론 각도까지. 등받이와 요추받침 조절은 수동인데, 팔 넣기가 좀 좁다. 헤드레스트 거리 조절까지 되는 것은 의외다. 룸미러 눈부심 방지와 헤드램프, 와이퍼는 수동. 그리고 화장거울 조명은 없다. 지프 컴패스와 마찬가지로 테일게이트 내장형 야외활동 스피커 옵션이 있지만 국내사양에는 빠졌다. 적재함 조명 겸용의 탈착식 LED 손전등은 그대로다.
캘리버는 준중형 승용차 정도의 휠베이스를 가졌고 시트는 보통의 승용차보다 높이 위치한다. 그에 비해 유리창이 좁다는 느낌은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시선이 높아 운전이 편하다.
뒷좌석 역시 높이 앉는 차의 장점을 잘 살려 공간이 널찍하다. 앞좌석 밑으로 발을 쑥 넣을 수 있고 등받이는 뒤로 눕힐 수 있다. 등받이를 더 눕힐 수 있도록 짐칸 덮개도 고정 위치를 2군데로 설정해놓았다.
짐을 많이 싣거나 길다란 것을 싣고자 할 때는 뒷좌석뿐 아니라 1열의 동반석까지 앞으로 접을 수 있어서 필요에 따라 유용하게 쓸 수 있다. 2천만 원 대 수입차 중에서 이 정도의 공간과 활용성을 제공하는 차는 없지 싶다. (닛산 로그 2WD만 빼고…)
실내와 달리 외관상의 변화는 눈에 띄지 않는다. 높이 띄운 차체에 편평비 60의 17인치 타이어를 끼웠고 바퀴와 휀더를 강조한 디자인이 놀이감각이다. 곡면과 모서리를 좀더 조화롭게 다듬었으면 좋았을 뻔 했다는 생각은 처음 봤을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솔직히, 해외에서 발표된 신형 컴패스의 성공적인 페이스리프트를 보면, 지금의 캘리버는 더욱 마음에 차지 않는다.
전동접이가 안되는 사이드미러는 뾰족하고 접히지도 않는 시동키와 함께 가장 큰 불만 사항이다. 어찌됐던 듬성듬성한 만듦새가 실내뿐 아니라 겉으로도 드러나는 것이 캘리버의 묘한 매력이다.
한때 280마력 대 터보 엔진과 4륜 구동 버전까지 나왔던 캘리버이지만 국내에서는 앞바퀴 굴림과 2.0 가솔린 엔진만 접할 수 있다. 2.4 엔진과 4륜 구동은 같은 집에서 파는 짚 컴패스와 겹치기 때문에 지금의 사양으로 굳어졌다. 사실 컴패스와는 실내외 부품도 일부 공유하는데, 나란히 세워놓으면 컴패스의 키가 확실히 크다. 그래도 캘리버의 껑충한 최저지상고가 갖는 장점을 생각하면 4륜 구동 욕심이 나는 것은 사실이다. 터보 엔진의 고성능 사양인 SRT4는 국내에 외장 패키지로만 선보였었다.
2.0이든, 2.4든, 이들의 가솔린 엔진은 현대자동차의 쎄타 엔진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차의 플랫폼도 기본적으로는 미쓰비시와 공동 개발한 것으로, 랜서, 아웃랜더 등과 사촌관계다. 캘리버의 선배인 닷지 네온이 일본산 소형차의 킬러 역할을 맡고 있었던 점을 생각하면 말 그대로 적과의 동침이다. 유럽에서는 폭스바겐의 디젤 엔진을 얹어 파는 것도 재미있다. 캘리버는 북미시장에 머물지 않고 아시아와 유럽 등 세계로 본격 진출하기 시작한 닷지의 첫 모델로도 꼽힌다.
아무튼, 장기기증자인 쏘나타가 140마력 대의 출력을 내던 시절에 크라이슬러는 이미 그 블록에듀얼 가변밸브 타이밍기구를 달아 158마력을 뽑아냈었다. 지금이야 쏘나타가 역전을 한 상태이지만 당시에는 꽤 부러웠던 기억이다. 캘리버의 2.0 엔진은 여전히 158마력/6,400rpm, 19kgm / 5,200rpm에 머무르고 있다.
여기에 물리는 변속기는 JATCO의 CVT인데, 외형상으로는 크라이슬러의 ‘오토스틱’ 조작부를 취하고 있다. 즉, 수동모드에서는 왼쪽이 시프트다운, 오른쪽이 시프트업이다. 유리겔라가 휘어놓은 것처럼 생긴 변속레버가 좌우로 덜걱 거리는 것은 실소를 자아낸다. 스티어링휠 스포크 뒤편에 있는 버튼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오디오 리모컨이다.
CVT라고 하면 연비위주의 김빠지는 주행을 생각하기 쉬운데, 캘리버는 오히려 팍팍 튀어나간다는 느낌이 강하다. 가속페달의 ON, OFF에 따라 클러치가 단속되는 듯한 거동이 나타나고, 조금만 밟아도 회전수에 아낌이 없다. 연료소비를 줄이겠다고 가능한 한 낮은 회전수를 유지하는 요즘 차들과는 다르다. 좋게 말하면 시원시원하게 젊은 감각이다.
그러다가도 작정하고 밟으면 회전수는 의외로 부드럽게 상승하는데, 가속감은 차의 성격대비 딱히 아쉬울 것이 없다. 풀 가속 때는 회전수가 레드존을 친 상태로 속도만 붙여나가는데, 0-100km/h 가속에는 10초 정도가 걸리고 160km/h까지는 수월하게 가속된다. 바늘은 180km/h에서 멈춘다.
100km/h 정속 주행 때의 회전수는 2천rpm. 고속에서는 스티어링 휠의 유격이나 타이어 편평비가 조금 신경 쓰이긴 하지만, 안정감이 딱히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제동 때는 조금 부족한 모습을 보였다. 바람소리나 노면소음, 돌 튀는 소리 등이 여과 없이 들어오는 것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모습이다.
닷지 캘리버의 가격은 2,990만원으로, 간신히 ‘2천만 원 대 수입차’ 타이틀을 유지하고 있다. 4년 전 국내 데뷔 당시의 가격은 2,690만 원이었는데, 그때와 비교하면 전동 시트와 ‘마이긱’ 오디오 등 사양이 좋아졌기 때문에 이해 못할 수준은 아니다. 안전장비로는 커튼에어백과 ESP등을 갖추었다. 공인연비는 9.9km/L. 230km를 주행한 시승기간의 평균 연비도 9.3km/L로 별 차이가 없었다.
글,사진 / 민병권 (rpm9.com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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