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보라라는 이름을 되뇌면 얼핏 에볼라 바이러스가 떠오른다. 중독성 강하고 치사율이 높은 에볼라 바이러스만큼이나 강력한 마력을 지닌 모델이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해 보지만, 막상타보고 나면 에보라 또한 얼마나치명적인 바이러스인지 실감하게 된다.
글, 사진 / 박기돈 (RPM9 팀장)
로터스에는 과거 에스프리라는 불후의 명작 스포츠카가 있었는데, 단종된 지 한참이 지나도록 별 소식이 없다가, ‘이글’이라는 개발명으로 엘리스와 엑시지 윗급의 새로운 스포츠카를 개발했다. 이렇게 개발된새로운 스포츠카는 개발명 이글 대신 ‘에보라’라는 이름표를 달고 등장했다. 에보라가 처음 데뷔했을 때는 에보라가 에스프리의 자리를 메울 줄 알았는데, 로터스는 머지 않아 완전히 새로운 에스프리도 선보일 예정이다. 따라서 에보라는 그냥 로터스의 새로운 GT 스포츠카로 봐야 한다. 미드십 2+2라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에보라는 2008년 영국 모터쇼에서 데뷔했다.
에보라를 처음 대하면, 섹시하게 잘 빠진 몸매에 대한 감탄과 함께, 이렇게 큰 에보라가 과연 로터스 다울까 하는 걱정도 생겨난다. 하지만 경량화에 의한 고성능을 지상의 과제로 삼고 있는 로터스가 어련히 알아서 잘 만들었을까 하는 믿음은 지금까지 만났던 로터스들의 실력을 떠올리면서 서서히 확신에 가까워진다.
차체 크기가 4,342x1,900x1,223mm에 휠베이스 2,575mm면 스포츠카로서 결코 크다고 할 수는 없지만, 엘리스와 엑시지를 생각하면 거대해 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많은 외신들이 에보라를 포르쉐 킬러로 지목한 바 있으므로, 크기가4,435x1,808x1,310mm에 휠베이스 2,350mm인 911 카레라와 비교해 보면 길이는 93mm가 짧고, 휠베이스는 225mm가 길다. 엔진 배치 방식이 미드십(MR)과 리어엔진(RR)임을 감안해서 비교해야 하겠다. 중량은 수퍼플라이급인 엘리스와 비교하면 무려 480여 Kg이 더 불어났지만, 그럼에도 1,515kg인 911 카레라에 비하면오리혀 165kg이 더 가벼운 1,350kg 수준이다.
에보라가 이처럼 가벼울 수 있는 것은 그 동안의 로터스 차들이 그랬듯이 압출성형된 알루미늄 차대와 FRP 바디를 사용하고, 서스펜션에도 알루미늄 단조 위시본을 적용하는 등 로터스의 경량화 기술이 총동원된 덕분이다.
스타일은 엘리스 등이 귀여우면서도 과격하고, 파격적인 디자인이었던 것에 비하면 상당히 차분한 느낌이다. 특히 빙그레 웃는 듯한 라디에이터 그릴 덕분에 더 온화해 보인다. 디자인 스터디를 먼저 공개한 미래의 로터스들은 더욱 세련되고 샤프한 스타일을 하고 있어서, 향후에도 에보라가 로터스 중에서 가장 부드러운 얼굴을 하게 될 듯 보인다.
지붕은 가운데 가르마를 탔고, A필러를 유광 검정으로 처리해 캐노피 스타일을 살짝 입혔다. 에보라의 보디라인 중 가장 섹시한 부분은 잘록한 허리가 아닐까? 지금까지 내가 본 모든 차를 통틀어 허리가 가장 가는 모델일 듯 하다. 최근 세기의 연인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작고 소식을 접한 터라 개미 허리 이야기에서 20세기 미의 표준이었던 그녀가 떠오른다. 그러고 보면 로터스에서 엘리자베스란 이름의 모델을 선보여도 좋을 듯하다.
각설하고, 잘록한 허리 덕분에 뒷모습을 약간 위에서 바라보면 엉덩이는 더 풍만해 보인다. 그리고 그 풍만한 엉덩이의 중앙에 검은 유리창 안으로 심장이 들여다 보인다. 엘리스나 엑시지에서는 누릴 수 없었던 호사다.
리어 램프와 그 주변은 기존 로터스 모델과 많이 닮은 편이지만, 뒤 펜더에서 치솟은 선을 따라 본격적인 리어 스포일러가 자리하고 있어 고성능 이미지가 더 강조되었다. 범퍼 아래에는 디퓨저가 장착되고, 듀얼 머플러는 중앙에 자리잡았다.
엘리스나 엑시지가 두껍고 높은 문턱으로 인해 승하차가 지극히 어려웠다면, 에보라는 문턱을 좀 더 얇고 좁게 만들고, 시트를 조금 더 높여 그 보다는 쉬워졌다…... 고는 하지만, 쉽지 않은 요가 동작을 연습하는 느낌은 아직도 여전하다. 그래도 도어가 넓어지고, 시트의 앞 뒤 이동 거리도 길어져서, 매번 타고 내릴 때 수동으로 ‘이지 억세스(승하차가 쉽도록 시트를 자동으로 밀어주거나 당겨 주는 기능)’를 작동시키는 것도 썩 괜찮은 방법이다. F1 머신에 드라이버가 타거나 내릴 때 매번 스티어링 휠을 뗐다 붙였다 하는 것처럼 말이다.
실내도 많이 화려해졌다. 마침 시승차는 가죽을 아낌없이 사용하는 프리미엄 패키지가 적용되어 있어서, 엘리스에서는 알루미늄 뼈대가 날 것으로 노출되었던 부분에도 빠짐없이 가죽을 입혔다. 센터페시아와 센터터널은 스티치가 강조되어 고급스럽고 스포티하다. 일부분에서는 가죽을 벗기고 알루미늄 속살을 많이 보여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스티어링 휠과 계기판 좌우, 센터 터널 부분에는 알루미늄 패널을 사용해 스포티한 분위기를 살렸다. 알루미늄은 기어 레버에도 사용되었는데, 후진을 위해 손잡이를 들어 올릴 때면 알루미늄이 스치는 소리가 상당히 매니악하다.
계기판 디자인은 예쁘긴 한데 작아서 시인성이 떨어지다 보니, 과격한 주행 시에는 정보 습득이 어렵다. 계기 오른쪽 창에는 TPMS, 왼쪽 창엔 평균연비, 시간, 외부 온도 등이 표시된다. 스티어링 휠 좌측엔 조명 작동 버튼들과 TCS, 스포츠 모드 선택 버튼들이 위치한다. 에보라는 라이트를 켤 때 로터리를 돌리거나 하지 않고, 미등이나 전조등, 안개등 버튼을 눌러서 켜고 끈다.
로터스답게 직경이 작고 스포티한 스티어링 휠은 아랫부분을 잘라낸 D컷 타입이며, 가운데를 알루미늄으로 꾸몄다. 특히 수동 변속기 모델임에도 크루즈 컨트롤이 장착되어 있다. 센터 터널에 있는 동그란 3개의 다이얼은 에어컨을 조작하는 것인데, 알루미늄으로 만들어 좀 미끄럽다. 까칠하게 처리를 했다면 더 멋졌겠다. 암레스트를 들어 올리면 그 속에도 알루미늄 프레임이 보인다. 정말 로터스답다.
가죽으로 감싼 버킷시트는 엘리스와는 달리 레카로 제품이다. 시트 속에 몸을 꼭 끼워 넣으면, 서킷으로 돌진하기 직전인양 긴장감이 몰려온다. 하지만 등받이 각도 조절이 되고, 뒷좌석에 탑승하거나 짐을 둘 때는 등판에 있는 레버를 젖혀 폴딩할 수도 있어 편리하다. 뒷좌석은 아주 잠깐 이동할 때 임시로 사용하거나 짐을 두는 공간으로나 쓸 수 있다. 아예 가죽을 걷어내고 짐칸으로만 사용하는 2인승 사양을 선택할 수도 있다.
스티어링 휠 우측에 있는 버튼을 눌러 여는 글로브 박스안에는 아이팟 연결 단자가 마련되어 있다. 네비게이션, 블루투스 등과도 통합된 7인치 알파인 터치스크린 멀티미디어 시스템과 연결하면 로터스에서 즐기는 첨단 멀티미디어가 신기할 따름이다. 사운드는 고음이 많이 강조되어 있어, 저음을 즐기는 이들은 이퀄라이즈로 조절해 주는 게 필요하다.
토요타에서 가져와 로터스가 손 본 V6 3.5 DOHC VVTi 엔진은 최고출력 280마력/6,400rpm과 최대토크 34.2kg.m/4,700rpm를 발휘하며, 2+2 시트 뒤쪽에 가로로 놓인다. 변속기는 토요타 계열 아이신제 수동 6단이 장착되었는데, 머지 않아 자동 변속기도 장착될 전망이다.
시동을 걸었는데 조용하다. 엘리스나 엑시지를 생각했다면 전혀 딴 세상이다. 아무리 엔진을 토요타에서 가져왔기로, 새삼 로터스도 이렇게 조용한 차를 만들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클러치는 911이랑 답력이 비슷하지만 스트로크는 살짝 짧은 느낌이다. 기어 레버 조작 시 단절감은 좋은 편이나 레버 길이가 좀 더 길어져 긴장감이 낮고, 기어를 물고 들어가는 감각도 엘리스 R이나 SC보다는 조금 둔한 편이다. 결정적으로 풋 레스트가 없어 무척 불편하다.
기어를 넣고 엑셀을 끝까지 밟으면, 계기판에 차례대로 빨간색 동그란 불이 들어오는데, 6,500rpm 근처에서 3개가 모두 들어온다. 변속하라는 신호다. 회전수가 6,500rpm을 넘으면 연료가 차단된다. 스포츠 모드에서는 7,200rpm까지 가서 불이 다 들어온다. 응답성도 빨라지고 소리도 더 날카로워진다.
스포츠 모드를 기준으로 각 단의 최고속도는 각각 60, 110, 160, 210km/h 정도다. 제원상 0~100km/h 가속 시간이 5.0초인데, 출발과 변속을 아주 잘 하면 그 정도는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기대치가 높아서인지 체감 가속은 극히 강력하다고 볼 수는 없는 수준이다. 정교하고 빠르긴 한데 폭발적이진 않다.
에보라가 폭발적이지 않다고 느껴져 고민해 본 결과 문제는 나한테 있었다. 로터스 내에서의 에보라의 위치나 스타일, 시트 수, 크기 등을 고려해서 계속 포르쉐 911과 비교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량에 차이가 나긴 하지만 911 카레라는 현재 최고출력이 345마력이고, 에보라는 280마력이다. 320마력의 카이맨 S보다 낮은 수치다. 결국 성능이나 가격을 기준으로 경쟁상대를 고른다면 911보다는 카이맨 S가 적수에 가깝다.
마음을 고쳐먹고, 에보라를 다시 바라보자 확실히 느낌이 다르다. 카이맨 S와 비교해 보면 에보라가 전혀 부족하지 않았다. 카이맨 S는 PDK 변속기에서 스포츠 크로노 패키지 플러스의 론치 콘트롤을 사용했을 때 가속이 4.9초다. 카이맨 S의 4.9초는 상당히 강력했었다. 특히 초기 응답성이 워낙 좋아 폭발적으로 뻗어 나가는 느낌이다. 반면 에보라는 드래그 레이스 모드가 아닌 일반 주행 모드로 계속 달렸기 때문에 초기 반응보다 회전수가 어느 정도 높아지면서 가속이 두터워진다.
엔진의 태생이 토요타인 점도 무시하기 힘든 것인지, 플랫한 토크 상승이 다소 덤덤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회전 상승은 날카롭고, 뻗어주는 힘도 충분하다. 엘리스 등이 작은 엔진에서 있는 힘, 없는 힘 다 쥐어 짜 내는 느낌과는 확연히 다르다.
포르쉐 911 카레라와 경쟁하려면 350마력을 발휘하는 에보라 S는 돼야 하겠지만, 280마력의 에보라는 한번쯤 도전해서 정복해 보고 싶은 매력적인 로터스다.
에보라가 엘리스 등과 다른 점 중 가장 큰 것은 고속 주행 능력이다. 차체가 커지고 힘이 좋아지면서 260km/h를 넘어서까지 달릴 수 있게 되었다. 최고속도까지 올라가는 실력은 996 초기 카레라의 느낌과 비슷하다. 바늘이 꾸준하게 올라간다.
고속에서의 직진 안정감은 차체가 커진 만큼 엘리스 등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좋아졌지만, 의외로 포르쉐들보다는 조금 부족한 느낌이었다. 그 동안 엘리스나 엑시지가 서킷에서 보여준 극도의 안정감을 감안하면 조금 아쉬운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그 만큼 기본적인 달리기에서 안락함을 조금 더 살리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사실 엘리스들은 승차감을 논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지 않았나. 에보라는 평상 시에 쉽게 몰고 다닐 수도 있을 정도로 안락해 졌다고 볼 수 있다.
시승하는 동안 본격적인 와인딩은 달려 보지 못하고 가볍게 코너링을 테스트 해 보는 정도로 달렸을 때, 코너링에 대한 기대치는 아주 높았다. 역시 로터스다. 안락함을 많이 살렸으면서도 안정감에 있어서는 양보를 하지 않았으리라. 아스팔트를 움켜쥐는 장악력도 그 한계가 어딘지 일반 도로에서는 쉽게 짐작하기가 어렵다.
에보라가 지향하는 바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로터스가 보여 줄 수 있는 최대한도 내에서의 안락함을 보유한 스포츠카, 로터스의 정수인 경량 고성능, 그리고 최고의 핸들링 성능에 대한 높은 기대감. 결국 에보라를 서킷에서 테스트해 보지 않고 평가하는 것은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기나 다름 없을 것 같다.
사족. 시동을 걸려고 하는데, 계기판에 동그라미 경고등이 들어오면서 시동이 안 걸리면 시동키의 버튼을 눌러서 경고를 해제 해 줘야 한다. 다른 로터스들도 그렇다. 고급스런 GT답게 후진 시 주차센서가 작동하고 모니터에는 후방카메라 영상도 나타난다. 엔진 뒤 쪽에도 작은 가방 정도를 수납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리어 뷰 미러를 통해서는 뒤쪽 교통상황을 파악하는 것보다 엔진 커버를 감상하는 것이 더 쉽다.
참, 에보라는 에볼라와는 전혀 상관이 없고, 에볼루션(Evolution)과 보그(Vogue), 아우라(Aura)의 합성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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