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블랙박스 조작을 막으려면…

발행일자 | 2013.10.21 09:07
▲ 김형중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 교수
<▲ 김형중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 교수>

미국에서는 블랙박스를 단 차량을 찾기 어렵다. 땅이 넓기도 하지만 교통사고가 났을 때 한국처럼 쌍방과실을 따지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뒤차가 앞차를 들이받으면 무조건 뒤차 책임이다. 경미한 충돌은 서로 아예 신경도 쓰지도 않는다. 주차하면서 앞차 뒤차를 가볍게 치는 일은 아주 흔하다.

한국 교통사고에는 일방과실이 없다. 어느 경우라도 쌍방과실이다. 가볍게 스치기만 해도 차선 가로막고 서로 사진 찍고 보험회사에 전화하고 다툰다. 교통체증은 아랑곳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블랙박스가 잘 팔린다. 적어도 블랙박스에 관한 한 한국이 세계 첨단을 달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 블랙박스 영상을 변조하는 일이 자주 발생한다. 자기에게 불리한 영상은 아예 삭제해버리기도 한다. 신호위반 차량 운전자들이 변조한 블랙박스 영상을 가져와 경찰에 항의하는 일이 많다. 그래서 경찰은 무척 곤혹스러워 한다.

얼마 전 모 방송국에서 비디오를 하나 받았다. 버스와 오토바이가 충돌하는 장면이 담겨있는 블랙박스 영상이었다. 기자는 이 영상이 변조되었는지 여부를 알려달라고 했다. 외부 전문가는 이 영상에서 트럭을 지웠음이 분명하다고 했다고한다. 유가족은 오토바이 운전자가 3차선에서 달리던 트럭에 치여 버스전용차선으로 튕겨져 들어왔다고 주장했다. 버스 운전자는 오토바이 운전자가 2차선에서 갑자기 1차선으로 들어오면서 유턴을 시도했다고 주장했다. 전자라면 버스 운전자에게 사고책임이 크고 후자라면 책임이 가벼워진다고 했다. 그래서 버스회사 측에서 트럭을 지웠다는 게 유족의 주장이었다.

학생들과 변조여부를 검증했다. 면밀히 조사해본 결과, 비디오가 변조된 것 같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비디오를 여러 차례 조사한 결과 문제의 트럭과 오토바이는 충돌할 위치에 있지 않았다. 트럭을 지우면서까지 비디오를 변조해야 할 이유가 없음을 알았다. 현장에 가서 비슷한 비디오를 찍어 비슷한 조건에서 압축도 해봤다.

몇 년 전에도 한 방송사가 건설현장에서 찍은 사진 두 장을 보내주면서 두 사진 가운데 하나가 변조됐는지 확인해달라고 요청했다. 역시 외부 전문가는 사진 하나가 변조됐다는 충분한 근거를 제시했다. 학생들과 함께 사진과 현장 맵을 바탕으로 3차원 모델을 만들고 시뮬레이션을 해봤다. 그 결과 변조됐다고 주장한 원고의 주장 대부분이 사실과 다른 착오임을 밝혔다. 이렇게 방송 오보를 막았다.

사진 한 장이 백 마디 말보다 더 낫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다른 증거가 없을 때 영상이나 오디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런데 영상이 변조됐다면 문제가 달라진다. 반대로 변조되지 않았는데 변조됐다고 주장해도 역시 난감해진다. 영상변조 여부를 간단히 확인하려면 해쉬 값을 쓰면 된다. 한국에서는 표준도 마련됐고 블랙박스에 해쉬를 쓴다. 잘한 일이다. 그래서 영상 어딘가가 변조됐다면 해쉬 값으로 변조 여부를 금방 알아낼 수 있다.

반면에 장면마다 해쉬를 따로 계산하고 연동하지 않으면 사고 영상 중 불리한 장면만 잘라냈을 때 삭제 여부를 알 수 없게 된다. 따라서 해쉬 값을 장면마다 연동시켜야 한다.

해쉬 연동 여부를 놓고 국내 블랙박스 제조사들 사이에서 의견 충돌이 있다고 한다. 해쉬를 연동하지 않은 블랙박스는 반쪽짜리임을 알아야 한다.

작아서 잘 보이지 않는 도주차량의 번호판 인식, 슬쩍 남의 사진을 도용해 저작권을 침해했는지의 여부 판별, 병무청에 제출한 의료영상이 바꿔치기한 것인지 알아내는 일 등 앞으로 할 일이 너무 많다. 김정일 관련 사진이 변조됐다며 이러쿵저러쿵 하며 나라가 시끄러웠던 게 엊그제 같다. 그래서 전문가를 키우고 기술개발에 앞장서야 한다.

김형중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 교수 khj-@kore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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