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만한 아우, 포르쉐 박스터 S PDK

발행일자 | 2009.03.21 17:12

포르쉐의 입문형 모델 역할을 맡고 있는 박스터가 카이맨과 함께 페이스 리프트되면서 2.5세대 모델로 거듭났다. 변화의 핵심은 신형 911과 같은 DFI 및 PDK의 적용. 직접분사방식 엔진과 듀얼 클러치 변속기의 도입에 따라 성능과 효율 양면의 발전을 이룬 박스터는 외관과 실내 역시 세밀하게 다듬어 미드십 로드스터로서의 매력을 더욱 강화했다. 10여 년 전에 데뷔한 1세대 모델과 비교하면 더 이상 막내다운 애교를 기대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해버린 느낌이다. 글/ 민병권 (www.rpm9.com 에디터)사진 / 박기돈 (www.rpm9.com 편집장)

‘이쯤에서 움찔 타각을 주고, 가속페달을 좀더 깊이 밟으면…’ 속도를 조금씩 더해가며 빠져 나오던 코너. 의도된 조작에 따라 차의 뒷부분이 스르르 바깥쪽으로 밀려나가기 시작했고, 본능적인 카운터 스티어 조작이 뒤따랐다. “오오 좋은데!” 차의 움직임이 제법 그럴싸한 그림을 그려낸 듯, 옆자리에서는 호기를 북돋는 감탄사가 들려왔다. ‘자, 이제 반대방향으로 튀는 것만 잘 잡아서 마무리 하면…’ 아뿔싸, 생각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차는 고개를 휘저어 코너의 바깥쪽으로 돌진하고 있었고, 운전자의 못난 몸뚱이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었다. ‘사/고/시/본/인/부/담’이라는 일곱 글자가 HUD처럼 눈앞에 펼쳐지면서, 입에서는 비명이 절로 흘러나왔다. “으아아아악~” 침착! 침착! 바닥이 꺼지도록 브레이크를 밟고는 좌로, 우로 바쁘게 손을 놀려 차의 머리를 도로와 나란한 방향으로 돌려놓았다. 길 바깥쪽은 평탄한 풀밭이었고, 차는 옆으로 쭈욱 미끄러지는 듯 하더니 정지모션 거의 없는 연속동작으로 다시 길 위를 달리고 있었다.


서킷에서, 역동적인 주행장면을 카메라에 담아 보겠다는 욕심으로 시도했던 ‘무(리)한도전’은, “집 팔 뻔 했네”하는 가슴을 쓸어 내리는 우스갯소리와 함께 싱겁게 막을 내렸다. 포르쉐의 주행안정장치인 PSM(Porsche Stability Management)은 물론 꺼둔 상태였다. PSM이 켜진 상태에서는 어지간한 허튼 조작과 과격한 요구도 모두 솜씨 좋게 다듬어져 부드럽고 빠른 주행으로 승화되기 때문에 이것이 안전을 위한 장치인지 랩타임을 줄이기 위한 장치인지 헷갈릴 정도. 스포츠 모드로 개입시기를 늦출 수 있을뿐더러 개입하더라도 티를 잘 내지 않기 때문에 운전자가 의기소침해질 일이 없다. 설사 PSM을 꺼놓더라도 자세를 흐트러뜨리기 위한 의도적인 조작이 아닌 이상은 극히 안정적인 라인을 따라 나가주니 코너링은 감탄의 연속. 짧게 반복되는 코너에 오버스피드로 진입하니 언더스티어가 발생하지만 줄어드는 속도에 따라 앞바퀴가 그립을 찾아나가는 과정이 스티어링휠을 통해 고스란히 전달되면서 올바른 운전법을 차근차근 일깨워준다. ‘역시!’ 답력조절을 통해 조금 가벼워졌다는 스티어링휠은 과격하게 달릴 때에야 비로소 그러한 느낌을 받게 된다.

같은 코스를 돌고, 또 돌아도 마냥 재미있다. ‘이거, 어떻게 돌아야 되는거지?’하고 하기 싫은 숙제만 잔뜩 짊어진 듯 했던 다른 차의 주행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달리기 자체의 즐거움이 살아있다. 잔뜩 고취된 상태로 그렇게 달리다 보니 차보다 사람이 먼저 지쳤버렸다. 원 없이 타봤다고 생각했지만 차는 여전히 너무도 쌩쌩했다. 여느 차였다면 진작에 넉 다운 증세를 나타냈을 조건이었다. 좌로 우로 쏠리는 몸을 지탱하느라 허벅지에 깔아뭉개진 시트의 측면 지지부가 아쉽긴 했다. 하지만 서킷의 급코너를 향해 맹렬히 질주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옵션으로 마련된 버킷시트를 선택하면 될 일. 노란색 캘리퍼로 구분되는 PCCB(포르쉐 세라믹 컴포지트 브레이크)까지 추가하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가격은 각각 640만원과 1,300만원. 아마 선뜻 지갑을 열게 되는 이는 적을 것이다. 이 차는 카이맨이 아니니까.

형제차 카이맨의 등장으로 인해, 순수하게 운전을 즐기기 위한 차로서의 박스터는 더욱 명료한 성격을 갖게 된 듯하다. 랩 타임에 연연하는 일은 차체 강성이 더 높은 카이맨에게 맡겨두자. 박스터에서는 지붕을 열고 바람과 햇살을 만끽하며 미드십 로드스터가 선사하는 운전의 즐거움만 누려도 충분하지 않은가. 그러한 의미에서, 성능 향상을 위한 투자보다는 실내외를 보다 세련되고 우아하게 가꿀 수 있는 옵션들 쪽에 더 눈이 간다. 지붕을 내렸을 때도 안팎의 조화가 멋지게 이루어져야 하니까. 이번 시승차가 좋은 본보기다. 2009년 2월말 국내 신고식을 가진 신형 박스터는 2세대 모델(987)의 ‘페이스리프트’ 버전이지만 얼굴 자체의 변화보다는 엔진과 변속기의 진화에 초점이 맞춰진다. 이번에 바뀐 박스터와 카이맨 모두, 먼저 선보여진 신형 911시리즈처럼 직분사(DFI) 시스템과 PDK (Porsche Doppelkupplung) 변속기를 적용 받았다. ‘모두’라는 표현에는 오해의 소지가 있긴 하다. 기본형 박스터와 카이맨은 배기량이 2.7리터에서 2.9리터로 높아진 대신 기존의 연료분사방식을 그대로 유지했고, 고성능 버전인 박스터S/카이맨S는 3.4리터의 배기량을 유지(정확히는 3,387cc에서 3,436cc로 확대)한 대신 DFI를 도입했기 때문이다. PDK는 팁트로닉을 대신해 모든 모델에서 선택가능해진 것이 맞다.

박스터S의 경우 기존 모델 대비 15마력의 출력증가가 있어, 6,400rpm에서 310마력의 최고출력을 내고 4,400rpm~5,500rpm에서 종전보다 2kgm 더 높은 36.7kg.m의 최대토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DFI적용과 함께 압축비가 11.1:1에서 12.5:1로 높아졌고 엔진자체도 개량을 통해 효율을 높였다. 여기에 물려 만만치 않은 시너지를 이루는 것이 바로 7단 PDK다. PDK는 기본적으로 수동변속기보다 0.1초 더 빠른 0-100km/h 가속시간(5.2초)을 제공할 뿐 아니라, 스포츠 크로노 패키지와 합세할 경우 이를 5.0초까지 단축시켜주는 론치컨트롤 기능을 쓸 수 있게 된다. 작동방식은 911의 그것과 같다. 차를 세우고 스포츠플러스 모드가 활성화 된 상태에서 변속레버를 D에 둔 채 왼발로 브레이크를 밟는다. 이때 오른발로 가속페달을 끝까지 밟으면 엔진회전수가 6,500rpm에 고정되고, 왼발을 드는 순간, 손실을 최소화한 총알 스타트가 시작된다.

성능이 이보다 더 높은 차량이라 한들, 수동변속기와 클러치 페달의 조작을 완벽하게 해주지 못하면 이러한 가속 성능은 맛볼 수 없다. 출력이 박스터 S보다 10마력 더 높아진 카이맨 S는 이러한 조합을 통해 결국 0-100km/h 4초대(4.9초)의 성능에 진입했다. 끊임없이 911의 자리를 위협해온 카이맨을 견제하기 위해 그 동안 허락되지 않았던 LSD 옵션 역시 이번에 박스터와 카이맨 모두에서 선택이 가능해졌다. 액티브 서스펜션인 PASM은 종전대로 옵션 적용된다. 1996년에 나온 1세대 박스터(986)는 2.5리터 204마력 엔진을 얹어 0-100km/h 6.9초, 최고속도 240km/h의 성능을 냈었다. 이번 박스터S PDK의 최고속도는 272km/h. 엔진 성능 자체만 봐도 박스터S/카이맨S는 996시절의 911 카레라(3.4리터,300마력)를 능가하는 수준까지 발전했다. 카이맨이 911을 위협한다면 박스터는 911 카브리올레를 위협하고 있다고 봐도 좋을 터. 후방엔진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가진 큰형- 911시리즈의 약점을 미드십이라는 우량 유전자로 야금야금 파고드는 얄미운 동생들이다.

조합에 따라 11~16%의 연비향상을 이룬 이번 2.5세대 모델에서 7단 PDK는 종전의 5단 팁트로닉은 물론 6단 수동변속기까지 앞서는 효율을 보인다. PDK를 얹은 박스터S 시승차의 100km/h 정속 주행시 엔진 회전수는 1,750rpm. 일전에 시승했던 팁트로닉S 버전의 2,400rpm과 단박에 비교된다. 팁트로닉S는 정차 때 2단으로 대기하곤 했는데 PDK는 1단으로 출발하는 것도 차이점. 65km/h만 넘어서면 이미 7단에 들어가기 시작해 80km/h에서도 회전수는 1,400rpm에 불과하다. 시승차에 남겨진 1,500km (출고 후 총 주행거리와 거의 비슷) 평균 연비는 6.25km/L였지만 때와 장소를 가려가며 밟는 오너라면 좋은 연비를 기대할 수 있을 듯 하다. 기본적으로 부드러운 변속을 제공하는 PDK이지만 가끔은 변속충격이 있고, 특히 변속시간을 단축시켜주는 스포츠 플러스 모드에서는 이것이 두드러진다. 클러치페달이 없을 뿐 토크컨버터가 아닌 두 개의 클러치를 이용하는 방식임을 생각해보면 – 수동변속기 조작시 급하게 클러치를 붙이는 조작을 생각해보면 – 이러한 반응은 오히려 자연스럽게 여겨진다. 시내 주행 시 어중간한 가감속을 하다 보면 변속기가 툴툴 거리거나 뭔가 밀려서 살짝 부딪치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리기도 하는데 역시 싫다기보다는 재미있다. 내 다리로 직접 클러치를 단속한다 해도 항시 비단결 같은 변속은 상상할 수 없거니와 이렇게 빠른 변속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자동변속기와 다름없는 클리핑 현상이나 언덕길 밀림 방지 기능도 고맙다.

다만 911 PDK의 것과 같게 바뀐 스티어링 휠(파나메라에도 달린다.)은 변속버튼이 마뜩찮다. 엄지로 누르면 시프트 업, 검지로 당기면 시프트 다운인데, 신형 911의 시승 때는 금새 익숙해질 듯 했던 것이 여태껏 적응되지 않고 있다. 주행이 과격해질수록 신경 쓰게 되는 부분이다. 사람 심리가 이상한 것이, 정 불편하면 레버로 조작해도 되련만 굳이 스티어링 휠을 붙잡은 양손을 놓지 않은 채 입으로만 구시렁거리게 된다. D에서도 버튼만 조작하면 임시 수동모드로 전환되는데, 레버를 M위치로 옮긴 수동모드에서는 운전자의 판단을 존중해 자동 시프트업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자동모드에서도 운전자 의도나 부하에 따른 자기 판단이 빠르지만 기본적으로는 승차감이나 연료절약과 타협한 변속프로그램이 적용되므로 스포츠 모드나 수동모드를 적절히 활용할 필요가 있다. 스포츠플러스에서는 변속반응과 가속페달 반응이 모두 당겨져 아드레날린을 과급하는 효과를 발휘하게 된다. 이는 더 강렬한 배기사운드를 즐기기 위해서도 필요한 부분으로, 체감성능에도 큰 차이를 주게 된다.

구동계가 바뀐 만큼 사운드의 질에서도 미묘한 변화가 있었다. 80~100km/h 정도 속도의 순항 중에는 상대적으로 조용한 구동계 소음으로 인해 노면 마찰음이나 바람소리에 더 귀에 들어오게 되는데, 이 상태에서 가속페달을 까딱거려보면 공랭식 엔진시절의 그것을 연상케 하는 듣기 좋은 공명음이 몸을 울린다. 엔진 회전수 자체는 기껏해야 몇 백rpm을 오르내릴 뿐으로, 굳이 몸과 귀가 피곤해지는 영역까지 회전수를 올리지 않아도 이처럼 좋은 연주를 들을 수 있으니 순항하면서도 자꾸만 탭댄스를 추게 된다. 그러고 보니 시동을 걸 때 들리는 앙칼진 엔진소리도 회전계 상으로는 채 2,000rpm에 이르지 않고 내뱉는 소리였다. 외관상의 변화는 구동계의 그것에 비해 덜 주목 받고 있는 듯 하지만, 미묘한 손질만으로 꽤 다른 느낌을 주고 있다. 수퍼카 카레라GT의 영향을 받은 헤드램프 부분은 이미 2세대 모델의 데뷔 때 언급되었던 부분인데, 이번에는 그러한 분위기가 더욱 강조되었다. 상하방향 대각선으로 놓인 안쪽의 실린더 배치는 911과 같은 구성이지만, 전체형상이 원을 이루고 있는 911보다는 곧 나올 파나메라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방향지시등은 두 실린더 사이에 가로로 내장되었고, 앞범퍼 끝부분의 리피터를 통해 반복된다. 직전까지는 박스터와 박스터S를 번호판 아래의 흡기구 유무로 구별했지만 이제는 둘 다 중앙 흡기구를 갖게 되었다.

범퍼 좌우측 흡기구는 헤드램프와 어울리도록 모양을 다듬어 이전보다 공격적인 인상을 풍기는데, 이 부분의 램프에는 네 칸으로 구분된 LED 주간 주행등과 LED 튜브를 이용한 미등을 적용해 한결 고급스럽고 세련된 느낌을 준다. 기본사양에는 LED대신 일반 전구가 들어가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사양이 될 듯. 특이하게도 전방 안개등은 없어졌고, 코리안 패키지에는 코너링 방향에 따라 전조등의 조사각이 바뀌는 다이내믹 코너링 라이트 기능이 바이제논 헤드램프에 딸려온다. 가로등이 없는 국도에서의 야간 와인딩 주행시 탁월한 효능을 발휘하는 장치다. (참고로, 국내에서는 당분간 LED 주간주행등 기능을 불능화시켜서 출고시킨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테일램프에도 LED가 적용되었다. 미등을 켜면 가늘게 웃는 눈 모양(^^)이지만, 브레이크를 밟으면 선정적인 두 개의 붉은 입술 형상이 생긴다. 하단선과 내부구성에서 수평요소를 강조했던 테일램프는 이전 모델보다 아래쪽을 둥글려 1993년에 선보였던 박스터 컨셉카를 생각나게 한다. 배기구는 일반 박스터가 통짜로 둥글린 직사각형, 박스터S가 두 개의 원형 파이프 구성이고, 이들을 중심으로 양 옆에 –다소 사족 같은 느낌을 주는 – 디퓨저 형상을 추가했다.

시승차에 달린 휠은 기본사양보다 1인치가 큰 19인치 ‘스포츠 디자인’ 휠로, 익스클루시브 옵션에 따라 차체와 같은 색으로 도색되었다. 앞쪽에 235/35ZR19, 뒤쪽에 265/35ZR19 사이즈의 미쉐린 파일럿 스포츠 타이어를 끼웠고 타이어 공기압 감지 시스템을 옵션으로 준비했다. 앞범퍼 측면의 방향지시등(리피터)이나 오른쪽 앞 휀더에 달린 주유구, 가동식 리어스포일러 등은 초대모델로부터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테일램프와 후륜 휀더의 볼륨감만큼은 초대 모델의 그것이 더 나았지 싶기도 한데, 이번 박스터와 비교하면 초대 모델은 수수하게만 보인다. 2.5세대 박스터는 치수상 별다른 변화가 없으면서도 실물을 보면, 특히 달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부쩍 커지고 화려해졌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1세대에서 2세대로 바뀔 때는 오히려 이 정도의 감흥이 없었는데, 이번 모델은 박스터가 아닌 또 다른 상급의 포르쉐를 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포르쉐를 처음 타보는 것도 아니면서 ‘왜이래 아마추어 같이’ 얼굴에 홍조를 띄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을까.

굳이 이유를 찾자면 각종 옵션을 이용한 시승차의 꾸밈새도 한몫을 단단히 했을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크림화이트’로 차체와 휠, 롤바 색상을 통일하고 지붕과 실내는 이와 대비되는 붉은 색으로 덮어, 어디 세워놓든 휴대전화 카메라의 세례를 받았다. 플라스틱과 가죽의 색을 절묘히 맞춘 붉은색 실내 마감은 신형 911(PDK)의 시승 때도 필자의 눈을 멀게 한 바 있는데, 이름이 ‘카레라 레드’란다. 이 정도로 꾸미려면 차 값에 얼마가 추가되는지 대충 머리 속에 계산이 나오는데도 입에서는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칭찬만 늘어놓게 되는 걸 보면, 포르쉐가 얼마나 장사를 잘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각 옵션파트의 가격은 포르쉐 코리아의 홈페이지에서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실내에서 눈에 띄는 변화로는 – 911과 동일한 디자인으로 바뀐 PDK 사양의 스티어링휠과 변속레버를 제외하면 – 박스터 급에는 처음으로 적용된 신형 PCM (Porsche Communication Management) 옵션을 들 수 있다. 터치스크린을 이용하는 이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에는 한글 내비게이션의 적용도 가능한데, 시승차에는 그 부분이 빠져있는 상태라 따로 준비해간 거치식 내비게이션을 부착해야 했다. 전원소켓(라이터)이 주차브레이크 손잡이 옆에 재떨이와 함께 들어있기 때문에 언뜻 전원 연결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지지만, 이럴 때는 동반석 왼쪽 종아리 부근에 있는 전원소켓을 쓰면 된다.

시승차의 오디오 사양은 7개의 스피커가 달린 사운드패키지 플러스. 그럼에도 소리가 다소 아쉽다 했더니 스피커에 보스 마크가 보이질 않는다. 다행히(?) 보스 사운드 시스템은 옵션항목에 포함되어 있다. 하기야 수평대향 6기통 사운드 시스템이 기본으로 탑재되니 오디오야 라디오와 스피커 두 개라도 충분하지 않을까. 어쨌든 시승차에는 6CD 체인저와 AUX/USB/아이팟 연결단자(암레스트에 내장)까지 적용된 상태였다. PCM하단의 에어컨 조작부는 시인성이 떨어지는 작은 화면을 아래쪽에 배치한 것과 맞물려 쓰기가 좋지 않다. 시승차는 바람 온도와 풍량을 개별적으로 조절해줘야 하는 ‘전자식 수동’ 방식으로 오묘한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만남을 시도했지만, 풀 오토 에어컨 사양도 없는 건 아니다. 시승차에서는 빠진 ECM 룸미러나 레인센싱 와이퍼도 마찬가지. 옵션을 최대한 배제한 ‘깡통(?)’사양의 박스터를 수동변속기로 타겠다며 돈을 모으고 있는 지인을 생각하면 이처럼 선택의 폭이 넓다는 게 고맙게 느껴진다. 그런 이들에게 삼각팬티형으로 바느질된 가죽마감 대시보드나 중앙의 크로노그래프, 차체색상으로 통일한 실내액센트 장식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좌석은 등받이 각도만 전동 조절, 높이와 거리는 수동 조절식으로, 이 역시 어떤 시트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바뀌게 된다. 열선기능은 물론이고 원한다면 신형 911처럼 통풍시트도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시승차의 시트는 겨드랑이 아래까지 꽉 잡아주는 느낌으로, 은근 살을 빼라는 압박을 주는 듯 했다. 스티어링휠은 각도와 거리조절이 가능하고, 곧추선 풋레스트와 가속페달이 묘한 긴장감을 자아낸다. 엔진이 뒤에 있는 만큼 운전석과 동반석 모두 다리공간에 침범이 없어 좋고, 대신 등받이는 마냥 뒤로 눕힐 수 없다. 엔진 격벽과 등받이 사이의 공간에는 납작한 노트북 가방 정도를 넣을 수 있겠다. 필자의 경우 시트를 최대한 낮춘 상태보다는 약간 높인 쪽에서 쾌적한 운전자세가 나왔다. 밖에서 보기에는 전자 쪽이 자연스러울지 몰라도, 막상 타고 보면 A필러 끝단이나 천장까지의 여유가 넉넉한 덕분에 높이 앉아도 부담이 없다. 양쪽 볼살을 모두 내려다보며 달리고 싶을 때 유효한 자세. 다만 지붕을 열고나면 그만큼 더 바람맞을 각오를 해야 한다. 윈드디플렉터가 부착된 상태였지만 앞유리가 심하게 드러누운 몇몇 컨버터블들보다는 머리모양이 더 쉽게 망가지는 듯 했다. 그것이 목적이라면, 즐기는 수밖에. 시동키를 꽂는 부분은 스티어링휠 왼편에 있는데다 운전석에 앉고 나면 안 보이는 위치라 헤매기 쉽지만 전통을 따른 것이라니 이해하고 넘어갈 부분이다.

수납공간은 의외로 곳곳에 다양한 형태로 마련되어있다. 시트 뒤편의 찬장은 쓰기가 그렇다 치더라도, 글로브 박스 위에 내장된 접이식 컵홀더나 도어 암레스트의 수납공간은 꽤 유용하다. 글로브박스에는 CD케이스와 필기구 홀더도 있다. 앞뒤로 마련된 트렁크는 리모컨이나 운전석 바닥 쪽의 버튼으로 열 수 있는데, 뒤쪽 트렁크(130리터)는 엔진과 배기시스템의 열로 덥혀지기 때문에 주로 앞쪽을 쓰게 될 것 같다. 150리터의 용량을 가진 앞쪽 트렁크는 김치독 마냥 깊어서 의외로 요긴하게 쓸 수 있는데, 아예 쇼핑백 홀더가 있었으면 더 좋았겠다. 이렇게 앞뒤로 트렁크를 열어놓아도 엔진은 보이질 않는다. 같은 미드십에, 지붕이 열리는 페라리 430 스파이더가 투명커버 너머로 엔진을 과시하고 있는 것과 비교되는 부분이다. 스텔스 엔진을 탑재하고 있는 셈이랄까. 엔진은 지붕 수납부 밑에 놓여있고, 뒤쪽트렁크 공간에 고개를 내민 오일 보충구를 통해 그 존재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이름의 유래가 된 자랑스러운 박서 엔진(박서+스피드스터)을 직접 볼 수 없으니 애석한 일이다.

지붕은 전동식으로 여닫히지만 잠금 장치만큼은 여전히 손으로 조작하도록 하고 있다. 손가락으로 작동시키는 나머지 부분과 대비돼 조작감이 거칠게 느껴진다. 마쯔다의 MX-5처럼 아예 앉은 상태에서 손으로 잡아 여닫을 수 있는 완전 수동방식도 좋지 않을까. 운치도 있고, 무게저감에도 효과적이고. BMW도, 페라리도 전동식 하드탑을 채택하기 시작한 마당이라 포르쉐만큼은 소프트탑으로 버텨주었으면 하는 생각도 든다. 지붕을 열거나 닫는데 걸리는 시간은 10초. 50km/h까지는 달리면서도 작동시킬 수 있고, 정차 중에는 버튼을 계속 누르고 있어야 하지만 주행 중에는 원터치로 작동한다. 처음에 플라스틱이었던 뒷창은 2003년형 모델이 나오면서부터 유리로 바뀌었다. 지붕을 닫더라도 고속주행시의 소음은 조용함이나 편안함과는 거리가 있다. 기존 모델과 비교해 확연히 커진 사이드미러는 시원스러운 후방시야를 제공하는 대신 풍절음에 기여를 하고 있을 것이다. 승차감도 땜질로 점철된 도로를 달리기에는 결코 좋다고 할 수 없지만 차의 성격을 생각하면 그리 흠잡을 부분이 아니다. 풍류를 즐기는 차에서는 빡빡한 잣대가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흔히 후방엔진 배치를 이어왔다는 점에서 911을 포르쉐의 원류, 356의 직계자손으로 본다. 그런데 사실 1948년에 처음 만들어진 포르쉐의 356 1호차(356-001)는 미드십의 엔진배치를 가진 로드스터였다. 비록 356은 후방엔진으로 개량돼 양산되었지만, 레이스를 휩쓸며 포르쉐의 이름을 널리 떨친 550 스파이더(1953)처럼 미드십 모델들은 포르쉐의 60여 년 역사를 일궈낸 중요한 축이었다.박스터는 바로 그 혈통을 이어받은 모델로 경량 미드십 로드스터 포르쉐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96년의 데뷔 당시에 비해 부쩍 성장한 모습은 이제 더 이상 포르쉐의 입문용 모델 자리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까지 들게 한다. 그래서 문득 떠오른 모델이 포르쉐 914였다. 914는 1970년대에 포르쉐가 폭스바겐과 협력해 만들었던 미드십 엔진배치/타르가 지붕의 보급형 스포츠카. 마침 요즘에 폭스바겐에서도 소형 미드십 로드스터를 개발 중이라고 하니, 거기에 포르쉐 버전을 하나 추가해 박스터의 자리를 넘겨주는 것은 어떨까.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쳐본다.

시승차를 반납하러 가는 길, 공교롭게도 같은 방향으로 달리던 카레라 GT를 만나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리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카레라 GT… V10 엔진을 얹은 수퍼카이긴 하지만 포르쉐가 탄생시킨 또 하나의 미드십 로드스터가 아니던가. 그리고 이 차는 저 차를 닮도록 성형한...` 행여나 점이 될세라 박스터의 속도를 80km/h로 유지하면서도 필자의 입가에는슬며시 미소가 지어지고 있었다.

포르쉐 카레라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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