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잠깐 동안 새로운 세상을 맛 봤다. 꿈 속에서 이상한 나라에 다녀온 앨리스마냥 아직도 어안이 벙벙하다. 롤스로이스 팬텀 쿠페의 세상은 그렇게 꿈같았다. 쿠페라지만 길이가 5.6m나 되니 그 거대함은 모든 시선을 빨아 들이는 블랙홀 같다. 6.7리터 V12 엔진은 2.6톤의 거대한 쿠페를 우아한 유람선처럼 여유롭게 순항시킨다. 화려함의 극치를 꼽자면 팬텀 드롭헤드 쿠페가 되겠지만 더욱 다이나믹하면서 좀 더 사생활을 보호받을 수 있는 펜텀 쿠페 또한 또 다른 극치임에 틀림없다.
글, 사진 / 박기돈 (www.rpm9.com 편집장),
롤스로이스라는 자동차 회사가 워낙 범상치 않은 브랜드이다 보니 1990년 대 국내에서도 롤스로이스 실버세라프가 판매되었지만 단지 ‘롤스로이스’라는 이름 외에 자세하게 알고 있는 이들이 많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찰스 롤스와 핸리 로이스에 의해 1906년 설립된 롤스로이스는 두 번의 다른 주인을 맞았다가 좀 복잡한 정리 과정을 거친 후 1998년 BMW의 소유가 되었다. 하지만 잘 알려진 것처럼 BMW는 ‘롤스로이스’라는 브랜드만 소유하게 되었고, 기존 롤스로이스 자동차를 생산하던 영국 크루 공장은 폭스바겐 소속이 되어 현재는 벤틀리를 생산하고 있다. BMW는 결국 새로운 롤스로이스를 생산하기 위해 영국 굿우드에 가장 롤스로이스 다운 새 공장을 건설하고 2003년 팬텀을 시작으로 2007년 팬텀 드롭헤드 쿠페, 2008년 팬텀 쿠페를 생산하고 있다.
역사적을 롤스로이스는 팬텀 시리즈로 대변되는 울트라 럭셔리 자동차와 실버 클라우드, 실버 스퍼 등의 보급형 자동차를 함께 생산해 왔다. 팬텀 시리즈는 롤스로이스의 그 유명한 실버 고스트를 대체하면서 1925년 등장한 이래 시리즈를 계속 발전시켜 팬텀 VI가 1991년까지 생산되었다. BMW 산하에서는 팬텀 시리즈가 먼저 선을 보이게 되었고, 이제 머지 않아 보급형이라 할 수 있는 고스트가 세상에 첫 선을 보일 예정이다.
필자는 롤스로이스 팬텀과 몇 번의 인연이 있었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롤스로이스가 한국에 진출한 후 한국을 배경으로 한 팬텀 사진을 촬영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서 팬텀과 팬텀 드롭헤드 쿠페, 그리고 팬텀 쿠페를 이미 촬영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번번이 이런 저런 이유로 직접 시승을 해 볼 기회를 갖진 못했었다. 그런데 마침내 팬텀의 최신작인 쿠페를 시승할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청담동 롤스로이스 전시장 앞에는 팬텀 익스텐디드 휠베이스 세단과 팬텀 쿠페가 나란히 서 있었다. 팬텀 쿠페는 전체적으로 조금 작아진 차체에 보다 유려한 디자인을 선보이는데 파르테논 신전도 A필러도 C필러도 살짝 더 누워있다. 하지만 여전히 팬텀 다움을 잘 유지하고 있다. 앞이 높고 뒤가 낮으며, 앞 오버행은 짧고 뒤 오버행은 길다. 보닛은 아주 길고 트렁크는 짧다.
앞모습은 드롭헤드 쿠페와 동일하다. LED 방향 지시등과 동그란 헤드램프가 시선을 유혹하지만 역시 거대한 라디에이터 그릴과 환희의 여신 엠블렘의 그늘에 가려지기 마련이다. 팬텀 쿠페는 엠블렘을 제외한 모든 부분들이 팬텀 세단과는 다른 모습으로 새롭게 디자인되었다. 긴 보닛 위를 덮고 있는 후드는 페인트 대신 브러시 처리된 스틸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어 강렬한 인상을 제공하는 포인트다. 균일한 자국을 만들기 위해 브러시 처리는 기계로 작업했지만 완벽한 마무리를 위해서 수작업으로 광택작업을 했다고 한다. 브러시 처리된 마감은 보닛을 지나 삼각형의 A필러에까지 적용되었다.
뒷모습은 리어컴비네이션 램프까진 드롭헤드 쿠페와 같은데, 범퍼 아래 좌우에 크롬을 입힌 배기구가 돌출되어 있는 점이 다르다. 트렁크도 드롭헤드 쿠페와 같이 위 아래로 나뉘어 열리는 피크닉 부트가 적용되었다. 윗 덮개만 열어서 짐을 넣거나 꺼낼 수도 있지만 아래 덮개까지 펼치면 보다 쉽게 짐을 실을 수 있다. 아래 덮개는 150kg까지 견디도록 설계되어 있어 어른 두 명이 나란히 앉을 수도 있다.
시승에 주어진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은 탓에 주행을 위한 장치확인을 간단히 하고 실제 주행에 나서야 했다. 스티어링 휠 옆에 위치한 동그란 패널 아래쪽에 키를 꽂은 후 가운데 ‘START / STOP’ 버튼을 눌러 시동을 건다. 원형 패널 안의 다른 스위치들은 조명을 조절하는 장치다. 스티어링 칼럼에 마련된 기어 레버를 살짝 들어 올린 후 아래로 내리면 ‘D’ 레인지가 되고 위로 올리면 ‘R’, 기어 레버 끝을 살짝 안쪽으로 누르면 ‘P’가 된다. 파킹 브레이크는 스티어링 옆에 따로 버튼으로 마련되어 있다.
워낙 거대한 팬텀인지라 그 크기에서 주눅들게 마련이지만 출발 전 팬텀 EWB 옆에 서 있는 쿠페가 상대적으로 작아 보여 조금 용기를 내 볼 수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도로에 들어서자 당장 2가지 문제에 부딪혔다.
첫 번째는, 역시 차체의 크기가 문제였다. 세단에 비해 많이(?) 작아졌다고는 하나 길이 5,606mm, 너비 1,987mm, 그리고 높이가 1,592mm에 달한다. 이처럼 차가 워낙 크다 보니 옆 차와 닿지 않을까 마음을 졸여야 할 정도다. 특히 앞 쪽에 나란히 달리는 두 대의 차 사이로 파고 들어야 할 때는 눈동자가 좌우로 왕복달리기를 하면서 간격들을 살펴야만 겨우 끼어 들 수 있었다.
일부러 차의 크기를 파악해 보려고 좌우 사이드 미러를 통해 여러 번 차선을 확인해 보았는데, 꼼짝 못할 만큼 차선에 꽉 들어차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조금만 방심하면 자칫 차선을 넘나들 수 있겠다. 오히려 운전석에서 반대쪽 사이드 미러를 보는 행동자체가 부담스러웠다. 사이드 미러가 워낙 멀리 떨어져 있어서 고개를 한참이나 돌려야 했기 때문이다. 흔히 하는 말로 사이드 미러를 보려고 고개를 돌리면 그냥 육안으로도 뒤까지 다 보일 정도다. 그런데 실제로 고개를 돌려 보면 두꺼운 C필러에 가려 뒤쪽 측면 상황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펜텀 쿠페는 시트 포지션이 펜텀 세단에 비해서는 조금 낮다. 하지만 도로에 나서자 필자와 눈 높이를 맞추는 다른 운전자들은 미니밴이나 SUV, 혹은 소형 트럭에 앉은 이들일 정도로 펜텀 쿠페는 높은 위치에서 운전을 하게 된다. 그 만큼 이 덩치 큰 차를 운전하기 위해 필요한 시야 확보에서는 유리하다.
두 번째 문제는 시승차의 운전석이 왼쪽이 아닌 오른쪽이라는 점이다. 국내에서 마련한 시승차가 아니고 싱가폴에서 마련한 시승차로 세계 여러 나라를 투어 하는 중 국내에 들어오게 된 차량이어서 그렇다. 필자는 국내에서 여러 번 우핸들 차량을 몰아 본 경험이 있을 뿐 아니라 수년 전에는 일본 도로에서도 수동 변속기 차량을 운전한 적이 있어 우핸들 차량 운전에 그리 부담은 없었다. 그런데… 시승해야 할 차가 우핸들 차량일 뿐 아니라 거대한 팬텀 쿠페이기까지 하니 결국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 아니던가? 압구정동을 빠져 나와 올림픽 대로에 들어설 즈음엔 벌써 오른쪽 운전석도, 그리고 거대한 차의 크기도 어느 정도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롤스로이스 팬텀을 운전하면 어떤 느낌일까? 정말 많은 독자들이 궁금해 할 것이다. 필자도 오랫동안 궁금해 했었다. 워낙 거대한 차인데다 우리 나라 같은 문화에서는 대부분 뒷좌석에 탑승하게 될 것이므로 직접 운전할 때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롤스로이스 측에서 자주 이야기하는 것처럼 전세계 적으로 롤스로이스 차량들은 오너가 손수 운전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고 한다.
팬텀 쿠페의 주행 느낌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호화 요트를 타고 있는 느낌이다. 도로의 작은 요철들이 의외로 조금씩 전달되기도 하지만 워낙 크고 무거운 차이다 보니 그 거동이 말 그대로 우아함 그 자체다. 엑셀을 과격하게 밟아도 팬텀 쿠페는 여유를 가지고 응답한다. 그렇다고 반응이 더디다는 뜻은 아니다. BMW가 만든 차답게 응답성은 좋지만 분명 여유가 묻어난다.
거대하고 육중한 팬텀이지만 스페이스 프레임 전체를 알루미늄으로 제작하는 등 그 속에 경량화를 위한 노력이 많이 더해져서 지금의 몸무게를 갖게 되었다. 물론 알루미늄 차체로 인해 뛰어난 강성도 함께 갖추게 되었다.
공차중량 2.6톤의 거대한 팬텀 쿠페를 움직이는 심장은 5,350rpm에서 453마력을 뿜어내는 6,749cc V12 직분사 엔진으로 브러시 처리된 매혹적인 후드 아래 조용하게 웅크리고 있다. 직분사 방식과 가변 밸브 리프트 & 타이밍 기술이 더해져 높은 파워와 연소 효율을 자랑한다. 최대토크는 3,500rpm에서 무려 720Nm를 발휘하는데, 특히 거대한 차체를 부드럽게 순항시키기 위해 최대토크의 75%가 1,000rpm에서 뿜어져 나온다. 변속기는 ZF 자동 6단으로 뒷 바퀴를 굴린다.
재미있는 것은 계기판에 속도계만 있고 회전계가 있어야 할 자리에 낯선 계기가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POWER RESERVE %’라고 기록된 이 계기에는 0에서 100까지 눈금이 표시되어 있는데 순간적으로 얼마의 파워가 남아 있는지를 표시해 주고 있다. 순항 할 땐 높은 수치에 바늘이 위치하다가 급가속을 위해 엑셀을 끝까지 밟으면 바늘은 금세 0을 향해 치닫는다. 과연 이 계기가 주행에 도움을 주며 실용적인가 하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여유로움이 팬텀과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주행이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다시금 실내 이곳 저곳으로 눈길을 옮겼다.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는 부분들은 거의 가죽이나 원목이며, 손으로 조작하는 부위들은 대부분 크롬으로 덮여 있다. 말 그대로 화려하고 고풍스럽다. 스티어링 휠은 림이 가늘고 직경이 커 마치 요트의 키를 잡고 있는 느낌이 든다.
시트는 탄탄하면서도 여유있는 가죽 소파 같다. 과격한 주행에서 몸을 잘 잡아주는 기능 같은 건 필요치 않다. 시트 조절 장치는 센터 암레스트 덮개를 열면 나타나는데 7시리즈의 것과 같은 방식이라 익숙하다. 센터 암레스트 앞쪽에 수납되어 있는 함을 열면 i드라이브 다이얼이 나타난다. 모니터는 데시보드 중앙에 위치한 시계 패널이 뒤집어지면서 나타난다.
사실 팬텀 쿠페에서 가장 주목 받는 것 중의 하나는 뒤로 열리는 도어다. 세단은 앞뒤 도어가 양쪽으로 열리지만 쿠페와 드롭헤드 쿠페는 뒤로 열린다. 처음엔 좀 어색했지만 계속 타고 내리다 보니 신기하게도 몸을 반 바퀴 돌리면서 타는 자세가 자연스레 몸에 베기 시작했다. 롤스로이스 측에서는 우아하게 승하차가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도어를 닫을 땐 A필러 안쪽에 있는 버튼을 눌러 주면 자동으로 닫힌다. 물론 BMW 7시리즈처럼 소프트 클로징 기능도 마련되어 있다. 열린 도어 옆구리에는 우산이 꽂혀 있고 차체 쪽에는 재떨이가 수납되어 있다. 아마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재떨이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거대한 차체에 비해 뒷 자석은 기대보다 좁다. 앞뒤 시트가 모두 엄청 두꺼워서 그런가? 어쨌든 팬텀 쿠페도 쿠페이니 만큼 앞좌석에 모든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는 셈이다. 쿠페와 드롭헤드 쿠페의 뒷좌석은 분리형은 없고 벤치형으로만 제공된다.
알칸타라로 덮여 있는 천정에는 무수한 작은 구멍들이 나 있다. 그 속엔 광섬유가 하나씩 박혀있는데 센터 암레스트에 있는 다이얼을 조절하면 천정에는 금새 1,600개의 별이 뜬다. 밝기는 조절이 가능하며 별마다 밝기가 조금씩 달라 실제 밤하늘을 보고 있는 느낌을 잘 살려 준다. 1,600개의 별을 가지려면 1,600만원을 들여 옵션을 선택하면 된다. 별 하나에 만원인 셈인가? 구멍 뚫린 천정 이야기 나왔으니 말인데 팬텀에는 냉방 시트 장치가 없다. 최고급 가죽에 구멍을 내지 않기 위해서란다.
고속도로에 접어 들면서 조금씩 속도를 높여도 보고 급가속도 해 보았다. 이 거대한 차체가 정지에서 100km/h까지 가속하는데 불과 5.8초 밖에 걸리지 않는다는 점은 실제 주행에서도 좀처럼 실감나지 않았다. 워낙 큰데다 지상고도 높다 보니 가속감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서다. 그저 생각보다 분명히 빠르다고 느낄 정도다. 가속 페달을 조금만 깊게 밟고 있으면 200km/h를 쉽게 넘나든다. 최고속도는 250km/h에서 차단되는데 초기 강력한 가속과는 달리 250km/h에 이르려면 어느 정도 인내가 필요해 보인다.
하지만 200km/h 전후의 고속 순항이라면 바로 팬텀 쿠페의 장기가 아니겠는가? 너무나 편안하고도 안정적인 순항이 가능하다. 펜텀 쿠페는 주행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 세단에 비해 뒤 댐퍼와 스프링을 보다 단단하게 조정하였고, 뒤 안티 롤바를 보강해 바디 롤도 줄였다. 스티어링도 보다 예민하게 조정했다.
그리고 팬텀 쿠페에는 다른 팬텀 모델들과는 달리 스포츠 모드가 마련되어 있다. 스티어링 휠 패드 우측에 있는 ‘S’ 버튼을 누르면 변속기의 기어 변환 프로그램이 바뀌면서 저단 기어를 더 오랫동안 사용하고 엑셀 반응도 증가 시켜 보다 다이나믹한 가속을 즐길 수 있다.
이처럼 팬텀 시리즈 중에서는 가장 다이나믹한 성격을 가진 팬텀 쿠페이긴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여유와 낭만이 가장 큰 장점임에 틀림없다. 드롭헤드 쿠페, 혹은 쿠페가 보여주는 디자인의 예술성과 화려함, 그리고 그 완성도는 예술적인 가치마저 크다고 볼 수 있다. 우아하면서도 거대한 차체는 도로 위에서 그 존재감을 최고의 위치에 올려 놓는다. 팬텀 쿠페는 울트라 럭셔리 퍼서널 쿠페의 궁극이다.
흥미로운 것은 세계적으로 롤스로이스가 한해 1,200 여대가 판매되고, 가장 강력한 경쟁 브랜드인 마이바흐는 300여대가 판매되고 있는데 반해, 국내에서는 오히려 마이바흐가 더 많이 팔리고 있다는 점이다. 롤스로이스는 뛰어난 자동차임과 동시에 살아 있는 역사와 전통이자 문화이다. 단지 돈이 많다고 해서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문화를 이해하고 즐길 수 있을 때 진정한 소유의 가치가 빛난다. 이런 가치를 잘 알고 있기에 국내에서 롤스로이스 판매가 기대 이하라는 점이 안타깝다. 그런 만큼 머지 않아 등장할 새로운 롤스로이스인 고스트에 기대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 [rpm9] 롤스로이스 팬텀 쿠페 시승사진 고화질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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