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토일드라마 ‘화유기’ 제3회는 시청자들의 뭔가를 건드리는 여운을 남기고 있다. 군 입대 전과는 다른 칼라를 보여주는 이승기(손오공 역)의 연기력은 차승원(우마왕 역)과의 대결 구도를 통해 서로를 돋보이게 만드는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요괴, 잡귀와 금수만도 못한 인간들이 판치는 세상을 표현하며 ‘화유기’는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지 시청자가 스스로 물어보게 만든다. 어른들을 위한 잔혹동화가 주는 메시지는 툭툭 뱉으며 나오는 것 같아도 무척 진지하다.
◇ 신선과 난봉꾼 사이를 오가는 제천대성 손오공 캐릭터, 민간인도 군인도 아닌 과도기적 심리상태에서 엄청난 연기력을 발휘하는 이승기
‘화유기’를 보면 이승기가 왜 이렇게 연기를 잘하는지 감탄하게 된다. 지금 심리상태가 민간인도 군인도 아닌 상태인 과도기적 상태에 있어서 그런지, 드라마 속에서도 신선과 난봉꾼 사이를 오가는 캐릭터를 그야말로 실감 나게 표현한다.
사랑하지만 오연서(진선미/삼장 역)에게 금강고를 빼달라고 끊임없이 말하면서 어떤 면이 진짜 자기의 모습인지 끊임없는 갈등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이성과 감정의 합의될 수 없는 갈등 같기도 하고, 양심과 욕망의 투쟁 같기도 한 모습을 이승기는 몰입해 표현한다. 서로 다른 감정을 동시에 느끼는 양가감정을 표현할 때의 표정과 몸짓은 시선을 집중하게 만든다.
살벌하고 건달 같아진 이승기가 뺀질뺀질 얼마나 연기를 잘하는지 보는 것도 흥미롭다. 눈빛이 당최 종잡을 수가 없다. 측은했다가, 깊었다가, 야수 같았다가, 애 같았다가, 사내 같다가를 반복한다.
실제로 이승기는 여친에게 저렇게 들이대는 행동을 하는지 상상하게 만들 정도로 ‘화유기’에서 그는 손오공답다. 홍정은, 홍미란, 두 홍자매 작가의 경험이나 판타지인지, 아니면 원래 남자들의 기본 본성인지 별별 생각을 하게 만들기도 한다.
오연서가 “가”라고 할 때 상처받는 눈빛, 그런데도 상처받았다고 말하면서도 쿨한 척하는 모습, 상처받았다고 그럼에도 알려주는 친절하고도 잔인함, 배려하면서도 이기적인 모습을 동시에 그리고 번갈아가며 표현하는 이승기의 연기력은 인상적이다.
상처를 보여주지만 결국 그 사람의 페이스에 말릴 수밖에 없는 속수무책인 이승기의 저돌적 행동은, 은근하고 점잖고 조심스럽고 그냥 아파도 묻는 사람들만 만났던 시청자에게는 낯설기에 두렵기도 하지만 낯설기에 더욱 매력적이고 호기심이 가며 끌리는 모습이기도 하다.
◇ 힘겨운 세상, 동화처럼 아름다울 수 있기를 꿈꾸는 사람들, 드라마에서 동시에 보여주는 판타지와 잔혹하고 살벌함
인간들은 힘겨운 세상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동화처럼 아름다울 수 있기를 꿈꾼다. 현실에서 불가능한 그 환상을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서 충족한다. ‘화유기’는 그런 판타지를 충족하는 듯하지만 무심하게 그래서 잔인하고 살벌한 실제 세상을 보여 준다. 인간이 아닌 요괴의 입을 빌려 세상의 잔혹하고 살벌함을 적나라하게 알려 준다.
‘화유기’에서 재미있지만 거칠고 유머와 해학이 넘치지만 뼈가 있는 대사들은 결코 가볍게 웃어넘길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이 드라마는 순수하게 하나씩만 전달하지 않는다. 양날의 검과 같은 상황을 수많은 장면에서 구현하고 있다.
‘화유기’ 속의 요괴들은 동물들 세상의 생존과 힘의 논리, 포식자와 먹이의 관계를 충실히 따른다. 애당초 인간이 아니므로 도덕과 체면과 당위 따위는 그들에겐 안중에도 없다. 그저 힘과 생존과 본능적 욕망을 쫓을 뿐이다.
우리는 인간이라는 탈을 쓰고 행해지는 수많은 비인간적인 일들을 현실에서 보고 겪으면서 괴리감에 인간성에 대한 혼란과 환멸을 느낀다. 돼지, 소, 개, 원숭이들에게 도덕과 의리 예의를 요구하는 것은 가당치 않다. 그래서 본능에 충실한 그들의 적나라한 약육강식 권력 욕망 추구는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때문에 인간이라서 마땅히 가져야 할 것 같은 도덕이라는 허세나 양심의 불편한 당위의 굴레 따위는 벗어버리고 그들의 배신과 야합과 술수를 권선징악이니 사필귀정과 같은 도덕적 관점에서 벗어나 판단 없이 볼 수 있게 된다.
‘화유기’에서 개나 소나 사회 지도층, 유명인, 연예인이라는 ‘개나 소나 드립’의 반복은 꾸준히 대리만족의 효과를 준다. 유명한 연예인은 요괴라고 표현하는 점 또한 마찬가지이다. 반대로, 동물의 위상을 다시 생각하게도 만든다는 점도 흥미롭다.
“저들은 금수니까 저럴 수 있지. 저러고도 남지. 내가 살아남으려면 나를 죽이거나 없애려는 자에게 저럴 수 있지.”라고 공감하고 응원하다 흠칫 놀라게 된다. 내 속의 공격성과 무자비함과 이기심이 저들 금수의 것과 다르지 않음을 인식하면서 말이다.
금수들의 세상과 너무 닮아있는 우리네 인간 세상을 보고 있노라면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지를 절로 묻게 된다. 우리는 무엇을 소명 삼아 살아가야 되는지 무엇이 저들과 달라야 하는지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요괴와 잡귀와 금수만도 못한 인간들이 판치는 세상에서 작은 우산 하나에 의지해 홀로 자신을 지키는 삼장은 거대하고 무자비한 세상 속에서 홀로 나를 지키며 살아가는 현대의 세상 속의 나, 인간의 모습과 오버랩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없이 버텨온 내가 기특해서 이번 생을 절대 포기할 수 없다는 삼장의 말처럼, 어른들을 위한 잔혹동화 같은 ‘화유기’가 희망을 주는 건 참으로 역설적이다.
천상욱 기자 (lovelich9@rpm9.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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