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포니와 주지아로 그리고 신입 기자의 추억

발행일자 | 2022.11.30 20:22
[취재수첩] 포니와 주지아로 그리고 신입 기자의 추억

지난 11월 24일, 현대자동차그룹 인재개발원 마북캠퍼스 비전홀에 이목이 쏠렸다. 무대에 오른 현대차그룹 CCO(Chief Creative Officer) 루크 동커볼케 부사장, 현대디자인센터장 이상엽 부사장은 그 어느 때보다 겸허한 자세로 서 있었다. 그들의 왼쪽에 배치된 차는 아이오닉5, 오른쪽에는 포니. 어떤 얘기가 나올지 모습이 그려졌다.

루크 동커볼케 부사장은 “현대자동차에 오고 나서 브랜드의 아이콘이 없다는 사실에 놀랐다”라면서 “현대차가 어느 분야에서 성공하지 못했나를 파악해봤고, 포니 쿠페의 복원을 요청했다. 그 과정에서 진정성 있는 차를 만들려면 포니 쿠페 창시자에게 부탁해야 한다고 판단했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조르제토 주지아로 대표는 전 세계 모든 디자이너의 아버지로 불린다”라면서 “포니를 시작으로 20년 동안 현대차의 디자인을 책임져온 그와 현대차의 스토리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얘기를 나눠보자”라고 말했다.

이어서 무대 오른쪽에서 조르제토 주지아로(Giorgetto Giugiaro)가 등장했다.


[취재수첩] 포니와 주지아로 그리고 신입 기자의 추억

조르제토 주지아로는 한국자동차 역사에 있어 ‘히딩크 감독’과 같은 존재다. 현대차는 1974년 이탈리아 토리노 모터쇼에서 첫 독자 생산 모델인 포니와 함께 선보인 포니 쿠페 콘셉트를 선보이는데, 바로 이 두 차를 디자인한 이가 조르제토 주지아로다. 현재 이탈리아 디자인 회사 ‘GFG 스타일’의 대표인 그는 포니와 포니 쿠페 디자인을 시작으로 포니 엑셀, 프레스토, 스텔라, 쏘나타(1, 2세대), 스쿠프 등 다수의 현대차 초기 모델들을 디자인했다. 1999년에 자동차 산업에 끼친 지대한 영향력을 인정받아 전 세계 자동차 저널리스트로부터 ‘20세기 최고의 자동차 디자이너’에 선정됐으며, 2002년에는 ‘자동차 명예의 전당’에 오르기도 했다.

현대차는 포니와 함께 승승장구했다. 1975년 12월 1일, 울산공장에서 처음 생산된 포니는 1976년 국내 판매 첫날부터 계약 건수 1000대를 돌파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고, 1976년에는 에콰도르를 시작으로 13개국에 1042대를 수출하고 1986년까지 30만 대 넘게 전 세계에서 판매됐다.

그러나 쐐기 모양의 노즈와 원형의 헤드램프, 종이접기를 연상케 하는 기하학적 선으로 전 세계 자동차 업계의 주목을 받았던 포니 쿠페 콘셉트는 아쉽게도 양산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사치를 조장한다’라는 이유에서였다.

포니 쿠페 콘셉트
<포니 쿠페 콘셉트>

그러나 포니 쿠페 콘셉트는 그대로 사라지지 않았다. 주지아로는 영화 ‘백 투 더 퓨처’에 등장하는 ‘드로리안 DMC-12’를 디자인하면서 포니 쿠페를 기반으로 완성했다. 비록 포니 쿠페는 태어나지 못했지만, DMC-12는 단종될 때까지 약 9000여 대가 양산됐으며, 1987년에는 미국 텍사스 휴스턴으로 공장을 옮겨 주문 생산 형태로 재생산됐다.

그렇다면 포니 쿠페 콘셉트카는 어디로 갔을까? 현대차가 뒤늦게 수소문했지만 결국 차는 유실되고 말았다. 이를 아쉬워한 이상엽 부사장은 올해 7월 처음 공개돼 전 세계 미디어와 고객으로부터 호평을 받은 고성능 수소 하이브리드 롤링 랩(Rolling Lab) ‘N 비전 74’를 통해 포니 쿠페 콘셉트의 정신을 되살리고자 했다.

현대차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포니 쿠페 콘셉트의 원형을 그대로 복원하기 위해 조르제토 주지아로와 손을 잡은 것이다.

포니 쿠페 콘셉트
<포니 쿠페 콘셉트>

주지아로가 옛 기억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1973년 당시 현대차 창업주께서 토리노에 방문했는데, 대량 생산차를 디자인해주길 원했다. 하지만 한국은 아직 자동차 산업이 시작되지 않은 곳이어서 최대한 만들기 쉬운 차로 디자인했다. 유럽과 달리 서플라이 체인(부품 공급망)이 부족해 어려움이 많았다”라고 회고했다.

그의 말을 들으면서 기자는 25년 전의 장면을 떠올렸다. 지금은 폐간된 월간 ‘자동차생활’에 막내 기자로 근무하던 시절, 주지아로 대표를 김포공항에서 서울로 모시고 오던 일이었다. 주지아로 대표는 당시 대우자동차의 라노스와 레간자를 디자인했고, 1997년 서울모터쇼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대우차의 초청으로 서울을 방문한 것이다. 이때 김포공항에서 서울 힐튼호텔로 의전할 인력이 필요했는데, 그 영광스러운 일을 내가 맡게 된 것이다.

김포공항에 도착한 그를 반갑게 맞이한 나는 그가 탑승하기 전에 ‘인증사진’ 하나를 부탁했고, 그는 흔쾌히 수락해줬다. 그때 찍은 사진이 바로 여러분이 보고 있는 이 사진이다.

[취재수첩] 포니와 주지아로 그리고 신입 기자의 추억

주지아로 대표를 또다시 만난 곳은 2004년 제네바 모터쇼에서였다. 바쁘게 일정을 소화하는 그와 오랜 얘기를 나눌 수는 없었으나, 오랜만에 얼굴을 본 것만으로도 너무 반가웠다.

그 뒤로 20여 년이 흘렀고, 기자는 50대 중반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기자로서 현장을 누빌 날이 몇 년 안 남았을 이 시점에서 주지아로 대표의 방한 소식은 쇼킹 그 자체였다.

주지아로는 최근 자동차 디자인 트렌드에 대해서도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포니 쿠페 콘셉트를 설명하는 조르제토 주지아로 대표
<포니 쿠페 콘셉트를 설명하는 조르제토 주지아로 대표>

“어느 시대이건 인체공학적인 건 변하지 않는다. 새로운 걸 디자인해도 결국 차 안에 사람이 들어가는 건 마찬가지다. 디자이너는 어떤 고객에게 사용되는가를 고려해야 한다. 지금은 너무 많은 걸 차에 집어넣어 가끔 당황스럽기도 하다. 균형이 중요하다. 자동차는 조각품이 아니고, 움직이는 물체다. 수천, 수만 개의 부품이 이뤄진 것이지만 예술적 감성도 놓쳐서는 안 된다.”

드디어 행사가 막을 내리고, 주지아로 대표가 무대 뒤편으로 걸어갔다. 나는 그에게 달려가 “나를 기억하겠느냐”고 물었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그에게 25년 전, 그와 같이 찍은 사진을 보여줬다. 그가 ‘박장대소’를 하며 웃더니 “옆에 있는 게 당신이냐”라고 물었다.

옆에서 이를 흐뭇하게 보고 있던 이상엽 부사장이 “두 분 같이 사진을 찍어드리겠다”라고 제안했다. 그 사이 우리 주위로 많은 기자가 몰려들었으나, 주지아로 대표의 바쁜 일정으로 한 번 정도 더 촬영을 허락하고 그는 자리를 떠났다. 그는 내가 보여준 사진을 돌려주려고 했으나, 나는 “당신을 위해 가져온 것”이라면서 선물했다. 악수를 위해 그가 먼저 손을 내밀었고, 나는 허리 숙여서 인사를 드렸다.

[취재수첩] 포니와 주지아로 그리고 신입 기자의 추억

주지아로 대표는 기자에게 소중한 기억의 연결 고리를 만들어줬다. 올해 85세인 그를 또 언제 뵐 수 있을까? 만약 다시 뵐 수 있다면 소원이 없을 것 같다.

이상엽 부사장은 “오리지널 포니와 포니 쿠페 콘셉트는 ‘아이오닉 5’와 ‘N Vision 74’ 등 여러 모델에 영향을 미친 특별한 작품”이라며 “주지아로의 손으로 다시 태어날 포니 쿠페 콘셉트를 통해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그리다(Shaping the future with legacy)’라는 철학을 지속 발전시켜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현대차의 공식 초청으로 방한한 조르제토 주지아로는 현대차·기아 남양연구소에서 디자이너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1974년 포니가 양산됐던 울산 공장을 돌아보는 등 현대차와의 협업을 시작했다. 현대차는 GFG 스타일과 공동으로 복원한 포니 쿠페 콘셉트를 내년 봄 최초 공개할 예정이다.

임의택 기자 (ferrari5@rpm9.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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