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07년, 기자는 독일로 날아갔다. 911 터보 카브리올레를 시승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한국에서 초대된 기자는 모두 여섯 명. 이 가운데 한 명은 업계를 떠났고, 또 한 명은 유명을 달리해 네 사람이 현재까지 업계에 남아 있다.
이 시승이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이유는 생애 최고속 주행기록을 세운 때였기 때문이다. 독일의 쭉 뻗은 아우토반에서 시속 290㎞를 넘길 때의 짜릿함은 아직도 생생하다. 지붕을 벗기고 달린 탓에 고속으로 갈수록 차체가 떨려 더는 속도를 못 낸 게 아쉬웠다. 만약 지붕을 씌웠더라면 시속 300㎞는 가뿐하게 넘길 성능이었다.
그 후로 17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더는 이런 경험을 할 기회가 찾아오지 않았다. 김영란법이 생긴 이후 해외 출장에는 추첨이나 선착순 제도가 도입됐는데, 포르쉐와는 지독하게도 인연이 닿지 않았다. 월간 자동차생활 기자이던 2003년에는 '포르쉐 카레라컵 아시아'에 한국에서 유일하게 초청됐고, 모터트렌드 기자이던 2006년에는 중국 주하이에서 열린 포르쉐 카이맨 시승회에도 참석했는데, 이젠 모두 희미해진 기억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한국에서 열리는 포르쉐 월드로드쇼를 비롯해 시승 행사는 꾸준하게 초대되었고 한국에서 시판되는 포르쉐는 거의 다 타봤다는 점이다. 최근에 열린 신형 911 GTS의 인제스피디움 시승회에도 참석 기회가 주어졌다.
이번 시승회의 주인공인 911 GTS는 최고출력 541마력, 최대토크 62.2㎏·m에 최고시속은 312㎞, 0→100㎞/h 가속시간은 3.1초를 기록한다. 기술적 특징 중 가장 눈에 띄는 건 일렉트릭 터보차저를 장착한 T-하이브리드 시스템이다. 과거 전통적인 터보 기술에 의존하던 것을 전자식 터보로 대체하면서 경량화를 이뤘고, 연비와 출력은 더욱 향상했다.
포르쉐가 모터스포츠와 레이스에 하이브리드 기술을 처음 쓴 건 2010년 911 GT3 R 하이브리드부터다. 제동 때 두 개의 전기모터가 회생제동 에너지를 저장하고, 가속 때 이 에너지를 프런트 액슬로 전달하는 방식이다. 2013년에는 918 스파이더에서 프런트와 리어 액슬에 각각 전기모터를 장착했고, 외부에서 충전해 순수 전기 모드로 25㎞를 달릴 수 있었다. 2014년에 나온 919 하이브리드는 포르쉐 최초로 800V 시스템을 써 초과 에너지를 전기 에너지로 전환하는 기술을 선보였다. 현재의 911 GTS는 초경량 고성능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장착하고 공도를 달릴 수 있는 최초의 911이다.

신형 911 GTS는 경량화도 돋보인다. 새로운 실버 컬러 경량 알루미늄 휠은 이전 모델 대비 스프링 하 질량을 1.5㎏ 이상 줄였고, 바이작 또는 라이트바우 패키지에서 이용 가능한 옵션 사양의 마그네슘 휠은 전체 중량을 9㎏ 줄인다. 새로운 40Ah 리튬이온 경량 배터리도 약 4㎏ 줄여 공차중량은 1420㎏에 불과하다.
이번 시승회는 포르쉐의 세심한 배려 덕분에 참가자의 실력별로 그룹을 이뤄 진행됐다. 먼저 서킷 경험자와 비(非) 경험자를 나누고, 경험자 중에서도 숙련자 그룹을 모아서 시승이 진행됐다.
시승차는 다양하게 준비됐는데, 나는 이 가운데 딱 한 대 있던 911 GTS 카브리올레를 골랐다. 서두에 얘기했던 17년 전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그동안 얼마나 많은 기술 발전을 이뤘는지 궁금해서였다.

911 GTS의 파워트레인은 일렉트릭 터보차저(eTurbo)와 작고 가벼운 고전압 구동 배터리, 효율적인 파워 일렉트로닉스, 새롭게 개발된 3.6ℓ 박서 엔진, 통합형 전기모터가 탑재된 강화형 8단 듀얼 클러치 변속기(PDK)로 구성된다.
일렉트릭 터보차저는 컴프레서 휠과 터빈 휠 사이에 있는 통합 전기모터가 터보차저 속도를 끌어올려 즉각적인 부스트 압력을 생성한다. 터보차저의 전기모터는 발전기 역할을 동시에 하며, 배출가스의 흐름에서 발생하는 에너지를 이용해 최대 11㎾(15마력)의 전력을 생성한다. 웨이스트게이트가 없는 일렉트릭 터보차저는 기존과 달리 하나의 터보차저로도 뛰어난 응답성을 보여준다. 덕분에 인제스피디움처럼 높낮이 차이가 큰 코스에서 긴 오르막을 달리면서 방향 전환을 해도 가속 지체 현상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이번 시승이 재밌었던 건 함께 달린 기자들이 모두 실력이 출중한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소위 말하는 '기차놀이'를 하면서 여러 대의 차가 마치 한 덩어리처럼 움직였다. 이런 시승회에서 911 GTS는 직선주로 최고시속 230㎞를 찍으며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다른 브랜드의 시승회는 시속 200㎞ 이하로 진행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다, 실력을 고려하지 않은 인원의 구성으로 제대로 발려볼 기회가 흔치 않다.

고속 기차놀이가 가능한 비결 중 하나는 400V 시스템과 통합된 포르쉐 다이내믹 섀시 컨트롤(PDCC) 덕분이기도 하다. 유압 탱크로 펌프를 구동하는 별도의 소형 전기모터가 달려있어 차체 자세를 빠르고 정확히 유지한다. 그래서 차체 리프트 기능을 작동하면 종전에 4초 걸리던 것이 1초 만에 끝난다.
이날 시승회에서 의외였던 건, 그동안 포르쉐 행사에 단골로 등장하던 미쉐린 타이어의 홍보를 볼 수 없었다는 점이다. 대신 그 자리에는 피렐리가 한구석에 'Power is nothing without control'이라는 문구를 적어넣고 소심하게 홍보를 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포르쉐와 미쉐린의 관계가 예전 같지는 않아 보인다. 굿이어나 피렐리 등을 순정 타이어로 장착하는 추세도 늘어나는 것 같다.
한편, GTS 발표 얼마 후 서울에서는 911 GT3 발표회가 열렸다. 911 GT3는 1999년 첫 출시 후 25주년을 맞아 2024년 10월에 글로벌 공개됐다. 그동안 나왔던 GT3의 개념을 잇는 모델과 함께, GT3 투어링 패키지도 동시에 나왔다.

신형 911 GT3는 최고출력 510마력, 최대토크 45.9㎏·m의 4.0ℓ 자연 흡기 박서 엔진, 고객 중심의 개인화 옵션이 특징이다. 엄격해진 현행 배기가스 기준을 충족시키기 위해 두 개 미립자 필터, 네 개 촉매 컨버터도 갖췄다.
포르쉐코리아 이석재 매니저는 “포르쉐의 전통적인 팬들은 GT3만큼은 전기차로 안 나오면 좋겠다거나 자연 흡기 차량으로 유지되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해 그것을 반영했다”라고 설명했다. PDK 변속기는 정지 상태에서 100㎞/h까지 가속하는 데 3.4초가 소요되며 최고속도는 311㎞/h다.
포르쉐 911은 단순한 스포츠카가 아니라 꿈의 아이콘 같은 존재다. 카레라든, 카브리올레든, 터보든 뭐든 간에 죽기 전에 더 많이 타보고 느껴보고 싶다. 그 무대가 아우토반이라면 더욱 행복할 것이다.
임의택 기자 ferrari5@rpm9.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