닛산 GT-R은 기존의 스카이라인 GT-R의 이미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명실상부 세계적인 수퍼카로서의 입지를 구축해 나가고 있다. GT-R의 모든 것을 경험해 볼 수는 없었지만 프루빙 그라운드를 3바퀴 돌면서 나름대로 GT-R의 성격과 내제된 파워를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었다. 성능대비 가격 경쟁력이 높아 좀 더 많은 이들이 극한의 성능을 경험해 볼 수 있게 되었고, 오너라면 좀 더 편하게 일상생활에서 초 고성능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글, 사진 : 박기돈 (rpm9 팀장)
어찌하다 보니 아직까지 GT-R을 본격적으로 시승해 볼 기회가 없었다. 마침 한국 닛산이 닛산 테크놀러지 익스피리언스 행사를 화성 자동차 성능 시험 연구소에서 진행하면서 GT-R도 시승해 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다. 행사에는 알티마를 이용한 슬라럼 체험과 무라노와 로그로 뛰어난 안정성을 경험해 볼 수 있는 세션도 함께 마련되었지만, 모든 이들의 관심은 GT-R에 쏠려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필자가 속한 조는 위에 말한 두 가지 세션을 먼저 하고, 마지막에 GT-R을 체험하는 순서로 진행하게 되었다. 두 세션을 진행하면서도 순간순간 귓전을 스치며 지나가는 전투기 소리에 자꾸만 마음이 그 쪽을 향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GT-R은 여느 수퍼카들과는 달리 배기음이 강렬하지 않다고들 하는데, 마침 그 날은 엄청난 바람이 불던 날 이어서였는지 초 고속으로 달리는 GT-R이 스치고 지나가면 마치 전투기가 지나가는 듯한 소리를 내곤 했던 것이다.
드디어 GT-R을 타 볼 수 있는 시간이 왔다. 시승은 GT-R을 타고 프루빙 그라운드(PG)를 세바퀴를 돌게 되는데 GT-R 앞에는 한국 닛산의 인스트럭터가 운전하는 370Z가 콘보이를 하게 된다. 앞서가는 370Z를 추월하지 말라는 것으로 일종의 속도 제한을 거는 것과 마찬가지이지만 사실 이날 370Z를 운전한 인스트럭터가 워낙 잘 달려 주어서 필자가 운전한 GT-R은 PG 상에서 달릴 수 있는 거의 최고의 컨디션을 발휘하며 달릴 수 있었다.
GT-R의 도어는 람보르기니 무르시엘라고나 애스톤 마틴 밴티지처럼 도어 면에 숨어 있는 길쭉한 손잡이의 한쪽 끝을 눌러 반대쪽이 솟아오르도록 한 후 그 쪽을 당겨서 여는 방식이다. 시트는 무척 두툼하고 근육이 잘 발달해 있다. 하지만 좀 더 단단하고 얇은 쪽이 수퍼카와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다. 시트는 슬라이딩과 리클라이닝 조절을 하나의 다이얼로 하는 전동조절식이다.
시트와 스티어링 휠의 각도와 거리를 조절해 운전 자세를 잡은 후, 인스트럭터가 간단하게 기능 설명을 해 주었다. 대표적으로 센터페시아의 모니터를 통해서 GT-R의 성능 및 차량의 상태를 다양한 수치와 그래프로 확인할 수 있는 다기능 디스플레이 시스템과 변속 시간, 서스펜션 세팅, VDC 개입조건 등을 변환할 수 있는 멀티 퍼포먼스 스위치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하지만 제한적인 시승이다 보니 다기능 디스플레이 시스템을 통해 어떤 것이 표시되는지 확인할 겨를이 없었다. 다만 멀티 퍼포먼스 스위치의 왼쪽 토글을 R모드로 바꾸어서 변속에 걸리는 시간을 0.5초에서 0.2초로 바꾸는 정도로 세팅을 마쳤다.
뭉툭한 기어레버 디자인도 독특한데, D 위치에 놓은 후 레버를 오른쪽으로 한 번 툭 밀면 M모드가 되고, 다시 한 번 툭 밀면 다시 D모드가 된다. 자동차 게임용으로 디자인된 듯한 스티어링 휠은 GT-R이 얼마나 정교한 스포츠카일지 기대하게 만든다. 칼럼에는 좌우에 변속을 위한 시프트 패들이 달려있다. 인피니티 모델들과 370Z에서 만난 것과 같은 것이어서 눈과 손에 익숙하다. 그래도 그들과는 다른 차원을 사는 GT-R인데 좀 더 특별하게 디자인되지 않은 것이 아쉽다.
기어 레버 앞쪽에 있는 버튼을 눌러서 시동을 걸었다. 부아앙 몰려오는 엔진 사운드가 자극적이진 않지만 긴장감을 높이기에는 충분했다. 앞서 달릴 370Z가 PG로 완전히 진입한 것을 확인한 후 부드럽게 엑셀을 밟으면서 필자의 GT-R도 PG로 진입했다. GT-R은 이미 다른 기자들을 태우고 여러 바퀴를 달려서 충분히 달궈진 터라 주저할 것 없이 엑셀을 끝까지 밟았다. 강력한 터보엔진의 가속감은 역시 탁월하다.
GT-R에는 V6 3.8리터 트윈터보엔진이 얹혀 485마력의 최고출력과 60kg.m의 최대토크가 뿜어져 나온다. 변속기는 듀얼 클러지 방식의 자동 6단이 적용되었고, 세계 최초 독립형 리어 트랜스액슬 아테사(ATTESA) E-TS 사륜구동 시스템이 더해져 고도의 안정적인 주행을 선보인다. 주행상황에서는 뒤쪽에 중량이 조금 더 실리는 것을 감안해서 중량 배분은 앞:뒤 53:47로 세팅하였다. 터보엔진에서 뿜어져 나오는 파워가 엄청나지만 파워를 네 바퀴에 고르게 분산해 주므로, 급출발을 해도 GT-R은 휠스핀 없이 강렬하게 튀어 나간다.
프루빙 그라운드의 뱅크를 달릴 때는 속도에 따라 차선이 정해진다. 속도가 점점 높아지면 자동으로 가장 바깥, 그러니까 가장 높은 차선으로 올라가게 되는데, 화성 자동차 성능 시험 연구소의 프루빙 그라운드는 최고속도가 200km/h를 많이 상회하지는 않게 설계 되어 있는 것으로 안다. 결국 가장 바깥 차선을 달리더라도 아주 고속으로 달리려면 스티어링 휠을 잡고 차선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이곳의 PG는 이미 다양한 차종으로 여러 번 주행해 본 적이 있지만 그들 중 GT-R이 가장 강력한 자동차이다. 그러니 조금은 긴장하게 되고, 또 이 곳에서 300km/h 가까이까지 달릴 수 있을 지 궁금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뱅크를 200km/h 정도로 통과하고 직선에서 260km/h 정도까지 속도를 올리며 달리다가 점차 속도를 높여 나갔다. 뱅크를 도는 속도가 240km/h 정도까지 올라갔지만 차선은 일부러 낮은 쪽으로 달렸다. 낮은 차선에서 고속으로 달리게 되면 강한 횡G를 느끼게 되는데, 다시 말하면 한계 이상으로 달리면 그립을 잃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하지마 아래쪽 두 번째 차선으로 240km/h 이상 달릴 때도 어느 정도의 횡G는 느껴졌지만 그립의 안정감에는 전혀 의심이 들지 않았다.
절반 정도를 돈 후에 앞서가는 370Z와의 간격을 벌였다가 뱅크로 접어들면서 속도를 높였다. 뱅크를 빠져 나올 때쯤 속도가 240km/h는 넘었던 것으로 기억이 되며 직선로가 끝나기 전 속도는 284km/h를 기록했고 뱅크 안쪽 차선을 골라서 속도를 줄였다. PG가 그 이상의 속도를 위해 설계된 곳이라면 속도를 줄이지 않고 그대로 뱅크 가장 바깥 차선으로 달리면 되지만 이 곳은 그렇지 못하니 일부로 더 이상의 가속을 하지 않은 것이다.
주행 여건이 서로 달라서 정확하게 비교할 수는 없지만 많은 이들이 비교하고 싶어하는 포르쉐 911 터보와 280km/h 전후 고속 영역에서의 가속 성능을 대충 비교해 본다면, GT-R이 더 우월하다고 보기는 힘들 것 같았다. 비슷하거나 아니면 조금 뒤지거나. 하지만 안정감은 비슷하거나 좀 더 나은 것 같았다. 사실 이 경우에서 안정감이 낫다는 것은 좀 더 편안하다는 의미일 수도 있겠다.
911 터보의 휠베이스가 2,350mm인 반면 GT-R은 2,780mm나 되니 그만큼 구조적으로 좀 더 안정적일 수 있는데다 닛산이 GT-R에 얼마나 정성을 들여 하체를 세팅했는지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고 보니 무르시엘라고 LP640의 2,665mm보다 더 길다.
남은 구간에서는 변속기를 수동으로 조작해 보기도 하고, 브레이크를 세게 밟아 보기도 했다. 닛산 최초로 적용된 듀얼 클러치 타입 6단 자동 변속기는 어디 흠잡을 데 없이 매끄럽게 가속하고, 기어를 내릴 때 빠르고 매끄럽게 회전수를 맞추어서 내려 준다. 조만간 370Z를 비롯한 여러 차량에도 확대 적용되길 기대해 본다.
브레이크도 이 정도의 성능에서 부족함이 없다. 강하게 페달을 밟아도 전혀 흐트러짐 없이 강력하게 감속한다. 극한의 뉘르부르크링에서 최고 기록을 수립할 정도니 브레이크의 전투력에 의심의 여지는 없어 보인다. 아쉽지만 즐거웠던 3랩이 그렇게 끝이 났다.
수퍼카로서의 GT-R에 약점이 있다면 가장 아쉬운 것은 디자인이다. 수퍼카는 눈이 돌아갈 만큼 매력적인 외모를 갖추어야 한다. `에브리데이 수퍼카`라고 해서 `에브리데이 300km/h`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냥 평범하게 시내를 돌아 다니더라도 모든 이들의 시선을 끌어 당겨야 한다. 섹시해야 한다. 하지만 GT-R은 그렇게 섹시하다고 할 수는 없다. 사실 370Z가 더 섹시하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GT-R도 분명 시선을 당기기는 하지만 자동차를, 특히 GT-R을 잘 아는 이들에 국한 될 가능성이 높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빨간색 GT-R로 시내를 돌아다녀 봐야겠다.
반면 닛산이 주장하는 에브리데이 수퍼카로서의 GT-R은 과연 그 경쟁자를 찾을 수 없을 만큼 확고하면서도 강력하다. 특히 탁월한 가격 경쟁력으로 인해 더더욱 그 진가를 발휘한다. 아우디 R8이나 포르쉐 911 카레라와 비슷하거나 혹은 더 낮은 가격으로 R8 V10이나 911 터보의 성능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 최고의 매력이다. 300km/h를 훌쩍 넘기는 911 터보와 그렇지 못한 911 카레라 간에 확실한 차이가 있음을 아는 이들에겐 GT-R은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다. 300km/h를 즐길 수 있는 기회비용이 그만큼 더 낮아진 것이다. GT-R의 가격은 1억 4,900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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