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는 지하2층에 있습니다.”
키를 건네 준 사내가 나지막이 말했다. 불 꺼진 빌딩의 적막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가는 동안, 문득 신차발표회 때 봤던 K7의 홍보영상이 떠올랐다.
드라마 ‘아이리스’의 한 장면처럼, 비밀 요원 ‘K’로 등장한 이병헌이 지시 받은 장소에 차를 찾으러 간다. 키만 받았을 뿐 어느 차에 타야 할지는 모르지만, 상관없다. 차가 먼저 K를 알아보고 반응을 보이기 때문에.
그 장면을 현 상황에 매치 시키니 살짝 흥분이 되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는 썰렁한 지하주차장에 잠들어 있다가, 주인을 인식하고 깨어나 반겨주는 자동차라니…이거, 감격할 준비부터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막상 당도해보니 주차장에는 차가 꽤 많았고, K7도 몇 대가 섞여있었다. 하지만 그 중에 필자에게 신호를 보내는 차는 한대도 없었다. 할 수 없이 키에 적인 숫자와 맞는 번호판의 차를 찾아 주차장을 한 바퀴 돌아야 했다. 여느 때 같았으면 시동 키의 버튼을 눌러서 차의 위치를 알아냈겠지만, 기아차가 세계최초라고 자랑하는 웰컴 기능의 감동을 첫 대면에서 느껴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수고를 마다하지 않은 것이다.
홍보 영상대로라면, 시승차는 기둥에 ‘K7’ 이라고 적힌 주차구역에 있어야 했다. 하지만 필자가 탈 차는 ‘은행 VIP고객 전용’이라고 쓰인 칸에 들어가있었다. 게다가 멀찌감치 나타난 이병헌에게 방향지시등으로 윙크를 날리고는 사이드 미러를 펼쳐 위치를 알렸던 홍보영상 속 K7과 달리 이 차는 범퍼 앞까지 다가가도 생까…아니, 묵묵부답이었다.
‘뭐야, 이병헌이 아니라고 무시하는 거야?’ 약간의 모멸감을 느끼며 운전석 쪽으로 걸어가 도어 손잡이를 향해 팔을 뻗는 순간, 그제서야 사이드 미러가 펴지면서 퍼들램프, 그리고 도어손잡이의 조명이 켜졌다. 이런 허탈할 때가…
알고 보니, 이 웰컴 시스템은 스마트키가 도어 1미터 범위 안에서 감지돼야 작동하는 것이었다. 즉, 차의 위치를 파악하거나 야간에 차까지의 접근을 용이하도록 하는 편의 조명 기능과는 별개라는 얘기. K7의 특징 중 하나인 LED 간접조명 포지셔닝 램프가 은은하게 점등되면서 ‘주인님, 이쪽으로 모시겠나이다~’할 줄 알았던 것은 순전히 홍보영상에 낚인 필자의 착각이었던 것이다.
운전자가 1미터 범위 내로 다가가면 퍼들램프와 실내조명이 켜지는 웰컴기능은 인피니티 EX를 통해 국내에도 소개된 적이 있으니, 기아가 세계최초라고 하는 부분은 아마 사이드 미러가 자동으로 펼쳐지는 기능 만을 말하는 모양이다. 퍼들(puddle) 램프는 말 그대로 발 밑의 웅덩이 등을 확인하기 위한 조명인데, 이것이 내장된 사이드미러가 ‘걸윙’ 방식으로 위를 향해 접혀있다가 운전자가 문 앞에 당도한 다음에야 펼쳐져 아래쪽을 비출 수 있게 되는 것은 조금 이상하기도 하다.
그리고, 이 ‘환영인사’와 도어록 해제는 별개. 손잡이의 버튼을 눌러 잠김을 풀고 도어를 열어젖히면, ‘빛과 선의 조화’를 테마로 한 ‘주인맞이 공연’ 제2부가 펼쳐진다. 도어 스텝의 K7로고가 점등되고, 풋램프와 룸램프, 그리고 대시보드와 도어의 크롬장식에 숨겨진 무드조명이 켜진다. 오피러스 프리미엄의 것과 비슷한 천장의 대형 룸램프는 선루프가 달리지 않은 차량만의 특권. 하얀 빛의 LED 맵등은 운전자의 시야 뒤편에서 앞쪽을 비춰주기 때문에 눈부시지 않아서 좋다.
국산차 중에 (관광버스 빼고) 조명에 이렇게 신경을 쓴 차는 없었다. 수입 고급 차들에서나 기대할 수 있었던 꼼꼼한 감성 조명을 이제 국산 차에서도 만나볼 수 있게 되었으니 흐뭇한 일이다. 혹자는 쓸데없이 이런 것 달지 말고 차 값이나 낮추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것이 바로 럭셔리(사치) 아니겠는가.
동급 국산 차에서 기대하기 어려웠던 사양들을 대거 내세워 ‘그 놈의 럭셔리’를 강조한다는 면에서, K7은 제2의 포르테라 할만하다. 하지만 차급이 있는 만큼, 그 ‘럭셔리’라는 표현에 대한 저항감의 정도가 다른 것은 사실이다. 운전석에 올라 문을 닫으니 계기판(수퍼비전 클러스터)에는 기아 로고와 함께 환영인사가 뜨고, 상쾌한 멜로디가 흘러나온다. 시동버튼을 누르자, 오르내리기 쉽도록 멀찌감치 물러나있었던 시트와 스티어링 휠이 제 자리로 돌아온다.
스티어링 컬럼의 깊이와 각도 조절은 전동식으로 이루어지고, 운전석 메모리 기능은 시트와 스티어링 컬럼, 사이드 미러의 위치뿐 아니라 계기판과 실내조명의 밝기까지 기억한다. 스티어링 휠에 내장된 열선도 고가의 수입차에서나 보던 사양이다. 시승 날은 마침 겨울 치고도 추위가 대단했기 때문에, 장갑을 끼고도 손이 시릴 정도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스티어링 휠이 빠르게 달궈지고 그 온기가 오래 지속된다는 것은 상당한 득점 요인이 될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여름날의 시승에서 통풍시트 달린 차가 좋은 점수를 얻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K7은 바로 그 시트 통풍 기능까지 갖추었다.
이처럼 호사스러운 사양들에도 불구하고 실내 재질감에서 아쉬움이 남는 것은 포르테 때와 마찬가지다. 특히 센터페시아의 블랙 하이그로시 처리가 도마에 오르기 십상이다. 계기판 위를 스티칭 가죽으로 덮었고, 센터콘솔에 리얼 알루미늄을 깔았고, 시트를 최고급 나파 가죽으로 감쌌지만, 블랙 하이그로시의 아우라를 견제하기에는 역부족인 듯 하다. 유행 아이템인 블랙 하이그로시(혹은 ‘피아노 블랙’)의 사용 자체가 문제라기 보다는 그 형상이나 다른 부분과의 조화가 부족해 보인다. 넓적한 센터페시아 말고도 윈도우 조작 스위치 주변과 스티어링휠, 변속레버에까지 적용됐으니 과유불급이라는 표현을 쓸 수도 있겠다.
변속기는 센터콘솔의 운전자 쪽에 치우쳐있고 동반석 쪽에는 세로로 두 개의 컵 홀더를 배치한 것이 신형 쏘나타와 같다. 콘솔 앞쪽의 서랍과 팔걸이 안쪽의 박스를 포함, 전반적으로 만족스러운 수준의 수납공간을 확보해놓았다. 주차브레이크는 풋브레이크 방식인데, 쏘나타에 있는 오르막 밀림방지 기능은 빠져있다.
뒷좌석은 보기보다 더 넓다. 머리공간이나 무릎공간이 충분한 것은 물론, 가운데 터널도 낮고, 앉은 자세까지 여유만만이다. 상위 모델인 오피러스보다도 5cm 가까이 (구형 에쿠스보다는 5mm) 더 긴 휠베이스의 이점이 그대로 드러나는 부분이다. 차체 길이는 오피러스의 5미터에 못 미치지만 폭은 같고, 높이도 1cm가 낮을 뿐이다. 스포티한 외관에 속은 기분이 들어도 어쩔 수 없다.
뒷좌석 편의사양으로는 가운데 송풍구 외에, 컵홀더와 시트 열선 조작버튼, 오디오 리모컨, 전원소켓과 수납박스가내장된 팔걸이를 갖추었다. 스포티한 외관만 아니라면 기사를 두고 타는 차로도 손색이 없었을 듯하다. 후진 때 자동으로 내려갔던 뒷유리의 전동햇빛가리개는 전진 위치에서 속도가 붙으면 슬그머니 다시 올라오는 눈치 빠른 물건이다.
K7을 시승한다고 하니, 몇몇 사람은 이 차에 지문인식 기능이 있는지 궁금해했다. 아이리스에서 지문인식으로 시동을 거는 장면을 봤다는 것이었다. “K7에는 없어요. 아우디 A8 같은 차에는 있죠.”라고 답해주었더니, 실망 섞인 반응들을 보이는 것이 재미있었다. 나중에 확인해봤더니, 드라마에서도 지문인식은 내비게이션에 담긴 비밀정보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 시동은 버튼으로 걸었단다. 왜곡된 기억이야 어찌됐던 간에, K7의 ‘아이리스 효과’가 대단하긴 한 모양이다.
시동음이나 500rpm을 살짝 넘는 공회전 시의 정숙성은 럭셔리라는 표현에 부족함이 없다. 가볍고 부드럽게 나아가는 주행감도 마찬가지. 다만 선행 양산 단계에서 조립됐다는 시승차는 가속페달에서 발을 떼도 마치 크루즈컨트롤에 의해 가속이 되는 것 마냥 차 스스로 회전수를 좀더 유지하려는 경향을 보여 위화감이 느껴졌다. 100km/h에서의 엔진 회전수는 1800rpm 정도로, 주행소음의 차단 역시 뛰어나다. 엔진 소리나 도로이음메를 통과할 때의 충격음은 멀찌감치서 들려온다. 다만, 일부 동승자가 풍절음을 지적하긴 했다.
변속기는 자동6단이고, 엔진은 MPI방식의 V6인 람다II 3.5를 탑재했다. 최고출력이 290마력이고 최대토크는 5,000rpm에서 34.5kgm로, 제원상 성능이나 공인연비(10.6km/L) 모두 경쟁모델들에 뒤지지 않는다. 참고로, K7 3.5는 오피러스 3.3은 물론 차체가 더 작은 그랜져 3.3보다도 가볍다.
풀 가속시의 자동변속 시점은 65/100/140/190(km/h) 정도. 최고출력은 6,600rpm에서 나오지만 수동모드에서도 6,250rpm 정도면 자동 시프트 업이 이루어진다. 대충 실측한 0-100km/h 가속은 7초 내외로, 제원상 수치라는 7.2초에 수긍이 간다. 다만, 조용한 엔진음과 밋밋한 배기음 덕분에 체감 성능은 뒤지는 편이다. 엔진 소리의 상승속도에 비해 차의 가속이 더디다는 느낌이 종종 들지만 시종일관 부드럽다는 점은 인정하고 넘어가야겠다.
인수 당시 총주행거리가 2,000km에도 못 미쳤던 시승차는 처음 얼마간 220km/h를 내기도 버겁게 느껴지더니만, 나중에는 속도제한장치가 작동하는 248km/h(계기판기준)를 그리 어렵지 않게 찍을 수 있었다.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은 것 마냥 개입해 차체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속도제한 장치는 과속에 대한 경각심을 제대로 불러일으켜준다.
시승차는 ECS를 장비했다. 4륜에 전자제어 댐퍼를 달고 여러 센서에서 취합된 정보를 분석해 주행환경에 따른 최적의 감쇠력을 제공해주는 고급사양이다. (필자가 받아본 카탈로그에는 ‘전자제어 에어 서스펜션’이라고 오기되어있었지만 ‘에어’서스펜션은 아니다.) 스티어링 컬럼 왼편의 ECS 버튼을 누르면 스포츠 모드가 되는데, 일반 모드에 놔두어도 일반 고객에게는 권하기가 조심스러워질 정도로 승차감이 단단했다. 진폭이 큰 요철에서는 괜찮지만 빨래판처럼 잔요철이 반복되는 곳에서는 꽤나 요란을 떤다.
그러면서도 EPS의 조향력은 깜짝 놀랄 만큼 가볍게 설정되어있다. 주차장에서는 물론, 속도를 붙여도 충분히 무거워지지 않는다. 덩치와 무거운 엔진을 얹은 FF구성에 비해 몸놀림은 좋다고 할 수 있지만 조향감은 겉도는 느낌이다. 수입차 시장에서 독일산 고급차들이 선호되는 것을 보면 단단한 승차감 자체는 의외로 문제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그저 단단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요철을 통과하고 나면 진득하게 제자리를 찾아야 하고, 코너나 고속에서는 그에 상응하는 안정감을 주어야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그러한 부분에서는 아직 숙성이 부족해 보인다.
기아는 K7에서 `다이내믹 럭셔리`를 강조했다. 현대차와 플랫폼을 공유하는 관계에서 이처럼 기아만의 색을 분명히 한 것은 분명 고무적인 일이고, 예전 기아차의 이미지나 최근의 디자인 방향과도 잘 부합한다. 경쟁모델이라는 렉서스 ES나 현대 그랜저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젊은 남성고객들의 취향을 잘 반영했으니 그것만으로도 의의는 있다. 다만, 한가지 방향을 정했으면 우선순위를 거기에 두고 끝까지 밀고 나가야 조화로운 결과물이 나올 텐데, 그 정도의 완성도까지 갖추기에는 아직 뒷심이 부족한 모양새다.
시승차는 K7의 최고급형인 VG350 노블레스 중에서도 프리미엄 모델로, 기본가격 4,130만원에 프리미엄 내비게이션으로의 업그레이드 비용 70만원이 더해져 차 값은 4,200만원이다.
글 / 민병권 (rpm9.com 에디터)
사진 / 민병권, 박기돈 (rpm9.com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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