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가에서는 각종 경연 프로그램이 인기다. 너무 많아져서 식상해진 면도 없지 않다. 그런데 얼마 전 인기를 끈 넷플릭스의 '흑백요리사'는 구성이 좀 달랐다. '백수저'로 불리는 베테랑 요리사 20명과 '흙수저'로 불리는 일반 요리사 80명이 참가했는데, 흙수저 요리사 80명은 경연을 통해 20명으로 추려진다. 그렇게 해서 남은 요리사가 백수저 요리사에 도전한다는 구성이다. 흙수저들이 백수저에 비해 실력이 떨어진다는 전제하에, 그 인식을 오로지 실력으로 극복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흥미롭고 독특한 스토리다.
시승과 서킷 체험 기회가 자주 있는 자동차 담당 기자들의 운전 실력도 천차만별이다. 많은 정보를 다루는 홍보 업계에서는 각 기자의 운전 실력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고, 이를 시승 행사에 반영한다. 그런데 이를 무시하고 진행한 행사가 있었다. 지난 13일에 열린 '메르세데스-벤츠 G-클래스 오프로드 익스피리언스 데이'가 그것이다.
이날 행사 구성은 크게 세 가지였다. 하나는 G클래스로 오프로드를 체험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AMG 모델로 서킷을 직접 달리는 것이다. 나머지는 'G580 전기차'로 G턴을 체험하고 궁금한 걸 물어보는 질의응답 코너로 채워졌다.
G클래스 행사는 무난했다. 경사로 주행이나 사면 주행, 도강 체험은 기자가 직접 체험했고, 다소 어려울 수 있는 코스는 인스트럭터가 시연을 보여줬다. 여기까지는 구성이 참 재밌고 알차다는 느낌이 들었다.
문제는 서킷에서 AMG 모델을 달릴 때였다. 주행에 앞서 인스트럭터가 이런 질문을 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서킷을 처음 달려보거나 실력이 미숙한 분 있으면 알려달라.”
놀랍게도 이 질문에 꽤 많은 기자가 손을 들었다. 서킷 주행 행사에서 이렇게 많은 '흙수저'가 참가한 것도 처음 봤다. 과연 행사가 제대로 진행될지 고개가 갸우뚱거려졌다.
인스트럭터는 운전이 미숙한 기자를 선도차 바로 뒤에 배치했다. 운전 미숙한 사람이 가장 뒤에 놓이면 행렬을 따라오지 못한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이 경우 전체 행렬이 느려지는 문제가 생긴다.
우려는 현실이 됐다. 선도차 바로 뒤에 있던 기자는 코너를 만날 때마다 브레이크를 깊게 밟아 속도를 떨어뜨렸고, 선도차와의 거리는 점점 멀어졌다. 인스트럭터가 무전으로 “거리를 너무 떨어뜨리면 안 된다”라고 알려줬지만, 그 얘기를 듣고 거리가 좁혀질 리 만무했다.
AMG A45의 주행이 끝나고 CLA AMG를 체험하기 전에 인스트럭터에게 말을 걸었다.
기자: “앞 운전자가 실력이 좀 부족한 것 같은데 뒤로 보내주면 안 됩니까?”
인스트럭터: “그러면 맨 뒤 운전자가 너무 처집니다.”
기자: “실력이 부족한 운전자가 앞에 있으면 전체 행렬이 느려지잖아요.”
인스트럭터: “저희가 인원이 부족해서 따로 케어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대로 시승이 진행됐고, 앞 운전자는 급코너에서 미끄러지며 러버콘을 세 개나 차 밑에 깔고 달리는 아찔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곳에 벽이 있었다면 들이받을 수도 있는 위험한 모습이었다.
여기까지 읽은 분들은 “그럼 어떻게 하라는 거냐?”라고 반문할 수 있다. 이런 경우에 대응하는 다양한 방법이 있는데, 실제 사례를 소개한다.
예전에 인천 영종도 BMW 드라이빙센터에서 M 트렉데이에 참가한 적이 있었다. BMW의 M 모델은 메르세데스-벤츠의 AMG에 비견할 수 있는 고성능 모델로, 서킷 주행 체험은 그 성능을 제대로 느낄 기회다. 이날 기자는 네 명의 참가자 중 가장 뒤에 배치됐다.
문제는 세 번째로 달린 기자가 너무 느려서 두 번째 참가자와 거리가 벌어지는 모습이 자주 나왔다는 것이다. 이를 '매의 눈'으로 지켜본 인스트럭터는 곧바로 무전을 보내 세 번째에 있는 사람이 네 번째 사람과 자리를 바꾸도록 했다. 그렇게 하면 비록 맨 뒤 운전자가 처지더라도, 다음 주행에서 행렬 간격을 맞출 기회가 생긴다. 서킷에서의 고속 주행도 제대로 체험하면서 전체적인 대열을 유지하는 방법이다.
서킷 주행 경험이 전혀 없는 기자가 많이 참석한 것 자체도 문제다. 과거 메르세데스-벤츠 홍보팀은 AMG 체험 행사를 진행할 때 서킷 주행 경험을 물어보고 실력별로 그룹을 정한 경우가 있었는데, 이번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비유하자면, 요리 처음 해보는 이가 백종원과 대결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서킷 주행은 상당히 위험하다. 최고시속 200㎞에 가깝게 달리고 고속에서 코너링이 이뤄지는 주행에 초보운전자가 참여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래서 많은 브랜드는 서킷 주행 행사 전에 운전 숙련도를 물어본다.
원래 제대로 진행하려면 서킷 라이선스를 발급하는 과정도 있어야 한다. 이것도 요식과정일 수는 있지만, 라이선스를 발급받기 전에 서킷 주행 요령과 주의사항을 듣기 때문에 아예 모르고 달리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실제로 페라리 같은 브랜드는 인제스피디움에서 체험 행사를 할 때 라이선스를 발급받게 한다. 물론 비용은 기자 본인 부담이다.
정이 넘치는 한국 사회에서는 이런 과정을 생략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 결과 서킷에서 크고 작은 사고가 벌어지기도 한다. 이날 벤츠 행사 전에 '사고가 날 때 본인이 부담한다'라는 내용에 서명하도록 했다. 이건 당연한 일이지만, 애초에 사고를 낼 가능성이 있는 미숙련자를 부르는 것 자체가 잘못된 일이다.
메르세데스-벤츠는 해외 시승 행사도 많이 진행한다. 그런데 AMG 같은 고성능 모델을 해외에서 시승하는 행사도 참가 제한 사항이 전혀 없다. 그러다 보니 과거에 독일에서 진행한 시승 행사에서 한국 기자가 사고를 일으켜 크게 다친 적도 있다.
포르쉐의 경우는 거의 모든 차가 고성능 모델이다 보니 해외 시승 행사를 진행할 때 서킷 주행 경험과 사고 여부, 수동변속기 경험 등을 물어본다. 사실 자동차 담당 기자라면 이런 능력을 당연히 갖춰야 하는데, 그런 이들이 많지 않기 때문에 이를 확인하는 것이다.
이날 벤츠 행사에서는 참석자 등록 전에 운전면허증 확인과 음주 테스트도 진행됐다. 설마 운전면허가 없거나 술을 먹고 행사에 오는 기자가 있을까 싶지만, 간혹 그런 이가 있다. 나는 해외 시승 행사에서 면허증을 확인하거나 음주 테스트를 하는 걸 본 적이 없다. 아쉽게도 한국 기자들은 이걸 확인해야 하는 수준이다.
수준 낮은 기자들이 모이면 결국 그 수준에 맞게 행사가 진행된다. 하지만 고성능 브랜드로 알려진 메르세데스-AMG가 그런 수준의 기자를 부르면 안 된다. 국내이건 해외건 마찬가지다.
요즘 브랜드의 홍보 담당자들은 기자들의 운전 실력을 거의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벤츠도 다른 브랜드의 행사 진행을 참고해서 시승 행사를 진행하길 바란다. 그것이 모두의 안전을 도모하면서 행사의 취지를 정확히 전달하는 방법이다.
임의택 기자 ferrari5@rpm9.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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