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신무역장벽 ISO 26262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왜구가 침입해올 것이라는 보고가 있었으나 당리당략 때문에 이를 무시하다 나라가 망하기 직전까지 간 것 아닙니까.”
왜 우리나라에서 ISO 26262 대응이 잘 되지 않느냐는 질문에 한 전문가가 이렇게 대답했다. 자동차 산업 전체에 깊은 충격을 줄 수 있는 중요한 표준이 해외에서 제정됐는데도 이를 알지도 못하거나, 알고서도 기존 기계 중심의 자동차 관념에 빠져 일부러 모르는 척 한다는 탄식에 가까운 말이었다. 글로벌 자동차 산업 패러다임 전환의 한 가운데 있는 ISO 26262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 불과 2~3년 후 `세계 5대 자동차 강국`이란 타이틀은 신기루에 그치고 말 것이라는 지적이다.
◇ISO 26262는 글로벌 전략을 위해 전장부품 제작 시 반드시 따라야 하는 국제 표준
ISO 26262는 차량용 전장부품시스템에 적용되는 `기능안전(Funtional Safety) 국제 표준`이다. BMW·메르세데스-벤츠·폴크스바겐이 주축이 된 독일자동차공업협회(VDA) 주도로 국제표준화기구(ISO)에서 제정돼 지난 2011년 11월 15일 공표됐다. 중량 3500㎏ 이하 승용차(상용차 제외)에 설치되는 전장부품시스템 가운데 안전과 관련한 부품은 반드시 이 표준을 따라 제작돼야 한다. 다만 전장부품이라도 안전과 관련이 없으면 표준에 해당하지 않는다.
반대로 안전과 관련한 부품이라도 전기전자(EE) 시스템이 포함되지 않으면 역시 표준을 따를 필요가 없다. ISO 26262는 `추적성(Traceability)` 개념을 명시해 표준을 따라 차량을 제작했음을 문서로 증명하도록 했다.
ISO 26262가 등장한 배경에는 자동차의 급격한 전장화가 있다. 전자부품 사용이 크게 늘면서 전자적 오류에 따른 자동차 사고 위험성을 줄이는 것이 업계 화두로 떠올랐다. 전장부품시스템 설계부터 검증·양산·폐기에 이르는 전 과정에서 안전하게 생산됐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표준 프로세스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2010년 현대자동차 에쿠스에 사용된 전자제어장치(ECU)만 70개에 달했다. 고성능 자동차에 사용되는 소프트웨어(SW)만 1억라인이 넘으면서 복잡성이 크게 높아졌다.
스트래티지 애널리틱스에 따르면 자동차 생산원가에서 전자부품이 차지하는 비중은 2010년 40%에서 2020년 50%로 커질 전망이다.
2009년 미국에서 발생한 도요타 리콜사태는 ISO 26262를 도입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됐다. 당시 연료 분사를 제어하는 전자제어 스로틀 시스템이 급발진 원인으로 지목됐을 때 도요타는 설득력 있는 반론을 제시하지 못해 11억달러(약 1조2000억원)라는 천문학적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무역장벽으로 작용...PL법 대응 잘못했다간 회사 파산할 수도
ISO 26262가 심각한 이유는 새로운 무역장벽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장 부품 업체들은 해외 완성차 업체에 납품이 어려워진다.
BMW와 폴크스바겐은 이미 ISO 26262 준수를 요구하고 있다. 국내 한 부품 대기업이 이를 지키지 못해 납품을 하지 못한 사례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GM은 부품 협력사에 ISO 26262 대응을 주문했으며 2016년부터 전면 적용할 예정이다. 도요타는 신규 개발 자동차에 적용되는 전장부품시스템에 ISO 26262를 적용하도록 협력사에 요구하고 있다. 부품개발기간을 감안해 유예기간을 주는 완성차 업체들도 대부분 2015년부터는 ISO 26262를 전면 도입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현대기아차 등 국내 완성차 업체는 제조물책임(PL)법을 회피하기 위해 반드시 ISO 26262를 지켜야 한다. 이 법에서는 `최신과학기술(the state-of-the-art)` 면책 조항에 따라 `해당 제조물을 공급한 당시의 과학·기술 수준으로는 결함의 존재를 발견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제조업자가 입증할 수 있으면 손해배상책임을 면하게 해준다. 이를 자동차에 적용해보면 전장부품 고장으로 사고가 발생해 소송이 제기됐을 때, ISO 26262에 준해 차량을 제작했다는 사실을 문서로 입증하면 책임을 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달 초 미국에서 티뷰론 에어백 결함으로 현대차가 159억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이 난 것에 대해서도 ISO 26262가 적용됐다면 이처럼 큰 배상금액 판결이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게 관련 전문가 판단이다.
김병철 한양대 미래자동차공학과 교수는 “기계분야에서 기술 평준화가 진행되자 선진 자동차 업체들이 전장분야에서 무역장벽을 치는 것”이라면서 “자동차 700만대를 생산해 70%를 수출하는 우리로서는 당연히 넘어야 하는 벽”이라고 강조했다.
◇대응역량 태부족...결국 현대차가 전면에 나서야
안타깝게도 국내 ISO 26262 대응역량은 기대에 크게 못 미친다는 게 다수 전문가 평가다. BMW 등 이미 ISO 26262 준수를 요구한 해외 완성차 업체에 수출하는 소수 부품 대기업을 제외하곤 ISO 26262에 대한 대응체계가 전무하다시피 하다는 것이다.
대응을 하려고 해도 관련 전문가가 크게 부족한 실정이다. 무엇보다 ISO 26262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대응하려는 노력 자체를 하지 않는 게 가장 큰 문제다. `이대로 가다간 2~3년 후 큰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위기감이 전문가들 사이에 팽배하지만 손 쓸 방도가 없다는 것.
결국은 현대차가 전면에 나서야 한다는 주문이 많다. 국내 자동차 산업 구조상 현대차가 나서지 않으면 부품 업체가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현대차는 최근 남양연구소 조직개편까지 하면서 ISO 26262 대응 전담팀을 신설했으나 아직 구체적인 ISO 26262 도입 로드맵을 마련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차가 출시한 차에서 전장부품이 차지하는 비중이 30% 정도에 머무는 수준이어서, 내부적으로 전장부품 세력이 기계세력에 밀리고 있는 것 아니냐는 분석까지 나오고 있다. 글로벌 자동차 산업에선 아직까지 변방에 머물고 있는 중국 상하이자동차가 부품업체를 이끌고 ISO 26262를 적극 도입하겠다고 선언한 것과 대비된다.
업계 한 ISO 26262 전문가는 “모든 전장부품에 대한 위험분석을 끝내고 명확한 지침을 내려줘야 부품 업체가 대응에 나설 수 있는데 현대차는 아직 이 분석작업이 안 된 것으로 안다”면서 “지금부터 시작해도 최소한 2년이 걸리는 작업”이라고 말했다.
김용주 기자 kyj@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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